90도 가까운 계단, 왓아룬을 오르는 일은 정말 다리가 떨렸다. 뒤를 돌아보면 공포가 극에 달할 것 같아 보지도 난간만 꽉 쥔 채 한 걸음씩 발을 떼었다. 그래도 왓아룬에 올라 짜오프라야강과 왕궁을, 그리고 방콕 시내를 한눈에 바라보는 일은 진짜 재미있었다. 탑을 보면서도 이렇게 높은 탑을 어떻게 쌓았을까도 너무 신기했고, 돌로만 쌓은 것이 아니라 도자기 조각들을 붙여서 만든 그 정성에 또 한 번 감탄하며 왓아룬을 감상했다. 내려갈 때도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지만, 그래도 올라와보길 정말 잘 한 것 같다.
간만에 편하게 잔 것 같다. 방비엥에서 닭과 개들 때문에, 어젠 기차 안이라서 그간 며칠을 편하게 못 잤는데, 여긴 조용했다. 일어나자마자 어제 찾아 놓은 국수 맛집을 가기로 했다. 숙소 위치가 진짜 좋은 게 걸어서 1분 거리에 맛집 두 개가 다 있었다. 나이쏘이라는 국수집.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아 그냥 다른 사람이 먹는 거 똑같이 시켰는데, 소고기국수였다. 면발은 투명하고 쫄깃했으며, 국물은 맑고 짭짤하니 맛있었다. 소고기도 꽤 들어있었고, 곱창 한 개도 들어있었는데 고소하고 전혀 질기지 않은 게 맛있었다.
숙소는 하루 더 머물기로 해서 연장을 하고, 운동화를 신고 나섰다. 샌들을 신고 다니니, 편하긴 해도 그래도 은근 발이 피곤한 것 같았다. 우리는 선착장까지 걸어서 왓아룬에 가기로 했다. 30분 정도를 걸으며 왕궁을 지나왔는데, 와, 이건 진짜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각종 투어 깃발이 여기저기 솟아있고, 바티칸만큼이나 복잡해보였다. 제대로 구경이나 할 수 있을지 궁금할 정도... 입장료도 비싼데 우리는 가지 말자고 구두합의를 하고 지나갔다.
선착장에서는 한 사람당 3밧을 내고 배를 탔다. 멀리 가진 않고 강 건너에 있는 왓아룬 앞까지만 데려다주는 배였다. 어제 강 건너에서만 봤을 때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는데, 가까이 갈수록 점점 커 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왓아룬 앞에 이르자 꽤 큰 탑이 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왓아룬에 가기 전에 우리는 그 옆에 있는 사원을 먼저 들렸다. 불상들이 줄지어 있고 사원 안에는 스님 한 분이 사람들에게 기도를 해 주고 있었다. 그러다 막대기 같은 것을 흔드는데 그 안에서 쌀 같은 게 나왔다. 신기했다. 점심시간이라 밖에서는 스님들이 점심 먹을 준비를 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주문 같은 기도, 그런데 우리가 사원을 다 둘러보고 나올 때 까지 기도는 끝나지 않았다.
티켓을 끊고 왓아룬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계단을 어떻게 올라야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어 오르다보니 어느새 탑 중간 부분, 올라갈 수 있는 최대 높이까지 올라가 있었다. 기념사진을 찍고 여기저기 감상을 하고 다시 내려왔다. 서로 올라가보길 잘 했다고 하며...
다시 배를 타고 건너와서는 버스를 기다렸다. 3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걸을 수도 있었지만 덥기도 했고 버스비가 얼마 안 해서 버스를 타기로 했다. 우리 숙소 앞으로 가는 53번이 왔고 버스를 탔다. 잠시 후에는 스님 두 분이 탔는데 표를 받는 아주머니가 다른 젊은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손짓을 하자, 젊은 남자는 일어났고, 스님 두 분은 당연하다는 듯이 앉았다.
태국 국민의 95%가 불교신자라고 하는데, 뭔가 이런 스님에 대한 우대가 생활로 배어있는 듯 했다. 종교가 생활에 배어있으면, 이게 정말 참 종교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태국 사람들은 그런 것 같았다. 어제 지나가면서도 안내해주는 사람들이 묻지 않아도 친절하게 이것저것 알려주었고, 스님이 지나가면 음식점 주인은 파는 음식을 내어주고 바로 그 자리에서 기도를 받는 모습들, 모두 신기하게만 보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늦은 점심을 먹었다. 숙소 근처의 다른 국수집, 블로그에서는 ‘쿤뎅(?)’이라고 하는 집이었다. 여기서도 그냥 일반 국수 큰 것과 작은 것을 시키고, 옆 사람들이 다 샐러드를 먹기에 우리도 한 개 시켰다. 매운데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그냥 시켰다. 이때 시키지 말았어야 했다. 국수 맛은 라면 스프 맛이 조금 나면서 그냥 뭐 괜찮았다. 라면 스프 맛이 나면 그냥 맛있는 거다. 그리고 먹은 샐러드. 우와, 이건 진짜 완전 매웠다. 태국고추의 그 매운맛이 온 몸으로 전해진다. 이 이후로는 혀가 얼얼해서 국수의 뜨거움만 느낄 뿐 맛은 느끼지 못했다. 매운 것을 나보다 더 잘 먹는 아내도 너무 매워한다. 이제 태국에서 매운데 괜찮냐고 물어보면 절대 시키지 말아야겠다.
얼얼한 입을 달래기 위해 우리는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찾아 나섰다. 이게 그렇게 맛있다고 하는데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하며. 이 역시 숙소 근처에서 찾을 수 있었고, 한 개 시키자 코코넛 속 안을 조금 긁어서 떠먹을 수 있게 해주고, 아이스크림을 담아서 연유를 뿌린 후 옥수수도 좀 뿌려줬다. 맛이 없을 수가 없는 비주얼이었다. 그리고 코코넛물 한 컵도 줬다. 코코넛만 사서 마시면 30밧인데, 이렇게 해서 40밧이라니, 완전 저렴하다. 코코넛물은 아내에겐 잘 맞지 않는 듯 했으나, 나는 완전 맛있었다. 초등학생 때 해운대에서 먹어본 이후로 처음이다. 거의 20년 만에... 뭔가 발효시킨 물맛 같으면서도 막걸리까진 아닌 그런 맛, 아주 맛있었다. 아이스크림도 코코넛 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이었는데 정말 맛있었고, 코코넛 안에 속살까지 진짜 맛있었다. 루앙프라방에서도 코코넛빵이 진짜 맛있었는데, 이제 나에게 코코넛은 진리인 것 같다.
오전에 돌아다니고 점심에 후식까지 먹고 나니 조금 피곤해서 숙소에서 푹 잤다. 24시간 인터넷 시간도 끝나서 할 일도 없었고, 그냥 한 세 시간 늘어지게 잤다. 일어나니 한낮의 열기는 조금 식은 듯해서 밖으로 나갔다. 맥도날드로가서 우리나라에는 안파는 콘파이 한 개를 시켜서 영수증에 적힌 40분 인터넷을 이용했다. 내일 뭐 할지 일정을 좀 짜면서...
저녁으로는 국수 맛집 한 곳을 더 가려고 했으나 지도에 표시된 곳에 가게가 없어서 그냥 주변에 인도음식 길거리음식점에 갔다. 치킨티카마살라를 한 개 시켜서 아내와 나눠먹었다. 난이랑 밥이랑 같이 나와서 양은 충분한 듯 했다. 아내는 정통 인도 카레를 처음 먹는데 완전 맛있어했다. 점심에 먹은 국수보다 더...
저녁을 먹고는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타이마사지, 오일마사지를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아내가 받고 싶어 하는 얼굴 마사지를 받았다. 40분 동안 9단계 코스로 얼굴을 만져주는데 세안부터 피지 제거까지 있다. 내 얼굴에 온갖 좋은 것을 바르면서 부드럽게 마사지해주는데 기분은 좋았다. 한 중간 까지는... 중반부터는 스팀을 쐬면서 모공을 넓혀주고 무슨 기계로 얼굴을 한 번 스캔(?)하더니 이후에는 피지제거를 시작했는데, 아 정말 눈물이 나왔다. 왼쪽 눈으로 눈물이 막 흘러서 마사지사가 휴지로 눈물을 닦아주면서 피지제거를 했다. “Are you OK?”라고 했는데, 나는 한숨을 푹 쉬고 그냥 OK라고 했다. 진짜 완전 너무 아팠다. 피지제거가 끝난 후에는 나에게 휴지를 보여주면서 너 블랙헤드가 엄청 많은데 300밧 더 들여서 추가 팩 하는 거 추천한다고 했지만 그냥 됐다고 했다. 근데, 안경 벗은 채로 휴지 봤는데 무슨 볼펜으로 쿡쿡쿡쿡 찍은 것 마냥 내 얼굴에서 저런 것들이 나왔다고 생각하니까 팩을 해야 하나 순간 엄청 고민이 되긴 했다. 마지막에는 완전 시원한 오이를 얼굴에 붙여주는데 화끈거리는 얼굴이 이제 좀 진정되는 느낌이다. 괴로웠던(?) 시간이 다 끝나고 코를 만지는데, 이건 내 코가 아니었다. 아기코로 다시 태어난 느낌이다. 너무 아팠지만 그래도 효과는 확실해 보였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어제보다 더 늦은 시간에 카오산로드를 지나게 되었는데, 중간에 마주보는 술집을 지날 때에는 정말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다. 그래도 신나게 춤추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니 즐거워 보이긴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는, 아내와 현실 이야기를 좀 했는데, 갑자기 급 암울해지기도 했었다. 지금 여행도 현실을 살고 있기는 하지만, 여행을 끝나고 돌아가서 우리는 뭘 할지 이런 현실에 대해서... 여행을 오기 전에 결코 가볍게 생각하고 결정해서 온 것은 아닌데, 또 막상 다시 생각해 보니 알 수 없는 뭔가에 쫓기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 그래도, 반대로 생각하면, 여행 안 왔으면 우린 그냥 일 했을 테고, 이런 고민도 안했겠지만 여행에서 느꼈던, 그리고 느낄 즐거움도 몰랐겠지. 이러고 보면 인생이란 뭘 하든 그냥 쌤쌤인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