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 도착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숙소를 예약해 놓은 것도, 가장 먼저 어딜 가기로 결정한 것도 없었다. 다만 머릿속에 있는 다섯 글자, 카오산로드. 방콕으로 여행온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는 카오산로드만 기억이 났다. 그래서 내려서 무작정 카오산로드로 가기 위해 전철역에 물어봤지만, 전철은 가지 않으니 버스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버스를 타기 위해 지나가는 분에게 물어봐 53번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갔다.
결론적으로 가장 먼저 이곳을 오길 잘 한 것 같다. 전철이 다니지 않는, 구시가지 같은 느낌이지만, 이곳에서 시작하는 태국 여행이 뭔가 제대로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숙소도 이곳에 잡아서 카오산로드를 오기 위해 따로 시간을 들여 올 필요가 없었다. 볼거리와 먹거리가 가득한 곳이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라오스처럼 여유나 쉼 같은 느낌과는 조금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루앙프라방은 전체가, 방비엥도 자연으로만 가도 여유를 느끼며 쉬는 여행의 성격이 강했다면, 여기서는 뭔가 할 게 많아서 안하면 손해 본다는 느낌이 드는 기분이다. 뭐가 좋고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라오스에 더 오래 있지 않은 것이 왠지 아쉬운 생각까지 든다.
그래도, 여기 카오산로드를 시작으로 앞으로의 태국 여행을 즐겁게, 그리고 신나게 해야겠다.
기차에서의 잠은 그리 편안하진 않았다. 내 자리가 끝 자리여서 객차와 객차 사이 연결 부분에서 나는 소음이 다 들렸고, 그래서 그런지 2시에도 깨고 4시쯤에도 깬 것 같다. 5시에는 방콕 거의 다 왔으니까 아예 승무원들이 깨웠고... 세수하고 이를 닦고 짐을 정리하니 침대를 다시 의자로 바꿔준다. 그리고 방콕 도착. 방콕이구나... 방학 때 뭐했냐고 물어볼 때, 아무데도 안 간 것을 ‘방콕’다녀왔다고 농담하던 그 방콕, 이런 방콕에 내가 30년만에 오게되다니, 뭔가 신기하다.
기차역을 나와 우리는 카오산로드로 향했다. 툭툭이나 택시를 타는 방법도 있지만 우리에겐 현지 버스가 제격이다. 한참을 기다려 53번 버스를 타고 카오산로드로 향했다. 버스에는 다른 외국인들도 많이 있어서 이 버스는 카오산로드로 가는 버스가 확실해 보였다. 여기도 베트남처럼 버스를 탄 후에 돈을 받고 버스표를 끊어주는 시스템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저랬는데, 여기도 교통카드나 그런 게 도입되면 이런 사람들이 모두 일자리를 잃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카오산로드라고 해서 내렸는데 조금 이상했다. 다른 외국인들도 여기가 카오산로드가 맞는지 하는 표정이었다. 뭔가 잘 아는 다른 외국인 커플이 길도 건너고 앞장서기에 은근슬쩍 다 따라갔다. 그러면서 우리는 숙소를 하나 둘씩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본 곳은 제일 저렴했지만 계단으로 5층이었고, 공동 샤워실이었다. 두 번째로 본 곳은 좀 비싸긴 했지만 모든 게 좋아 보였다. 일단 패스. 이렇게 세 번째, 네 번째, 알아보다가 적당한 가격과 화장실이 딸려있는 숙소로 결정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와이파이를 30바트(1,000원) 내고 24시간을 사용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도 방을 받고 침대에 누웠는데, 대박, 침대가 완전 편하다.
짐을 풀고 우리는 먼저 조금 자기로 했다. 기차에서 너무 불편해 오래 못 잔 것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 피곤했다. 침대에 누우니 잠이 스르르 바로 든다. 한 세 시간쯤 잤다. 아침밥도 거른채...
일어나서는 아까 숙소를 알아보러 돌아다니다 본 길거리 길거리 식당에서 팟타이를 먹었다. 농카이보다 조금 더 비쌌는데 맛은 별로 없었다. 일단 숙주를 익혀주지 않아서 매우 비렸다. 걸러내고 먹을 수밖에... 밥을 먹고 우리는 정말 카오산로드로 가보기 위해 20바트를 주고 파인애플 한 봉지를 사서 먹으며 골목을 걸었다. 개와 고양이가 많은 것이 아내를 매우 힘들게 했다. 라오스만큼 많은 것 같다.
카오산로드 가는 방향이라고 써진 안내를 따라 가다보니 진짜 카오산로드가 나타났고, 우리는 조금 놀랐다. 양쪽으로는 온갖 물건을 팔고 먹거리도 많았는데, 루앙프라방에서 보던 그런 야시장과는 분위기가 달랐고, 하노이의 야시장보다는 뭔가 더 들떠있다고 해야 하나? 뭐, 아무튼 그런 느낌이었다. 그동안 봐왔던 것들과 비슷한 것을 팔면서도 뭔가 여긴 달랐다. 일단 짝퉁 옷들을 상당히 많이 팔았고, 정장을 파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과일부터 코코넛아이스크림까지 먹거리도 널려있었다. 맥도날드, 버거킹, KFC도 다 있었다. 여긴 뭔가, 신세계다.
카오산로드를 대충 구경하고 잠시 숙소로 돌아왔다. 앞으로 어떻게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카오산로드만 구경할 수 없어서 인터넷을 좀 해야 했다. 그래서 30바트를 내고 24시간 계정을 한 개 받았다. 기기 1대만 사용할 수 있는 사실은 모른 채... 어쩔 수 없이 노트북으로만 이런저런 정보를 알아보고,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곳, 해야 할 것들을 적어나갔다.
아내가 이것저것 말하는데 나는 뭔가 좀 초조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힘들어지는 여행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과, 아직 방콕과 친해지지 못해서(?) 굉장히 어색한 느낌? 오늘 처음 만난 사람과 함께 손을 잡고 뛰어가야 하는 그런 어색함이랄까... 그래서 계속 그냥 라오스가 그리웠고 좀처럼 기분이 나지는 않았다.
몇 가지 관광 명소를 알아낸 결과, 우리가 있는 곳과 왕궁, 왓아룬은 가까운 편이라서 일단 가보기로 했다. 오후 늦은 시간이라 입장은 내일 하더라도 왓아룬을 보며 해지는 모습이라도 보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 걷기 시작했다. 가면서 여행자안내센터에서 지도도 얻고, 짜오프라야 강가에 있는 부두도 세 개나 지났다. 강가에는 배들이 가득했는데 모두 사람들을 태우고 투어를 하거나, 아니면 정말 버스처럼 가는 배들이었다.
세 번째 부두에서는 왓아룬이 보였고,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뭔가 방콕의 상징이라고 하는 탑을 보니 신기했다. 모두의 마블에도 나온다고 하는 그 왓아룬. 방향이 맞지 않아 왓 아룬 뒤로 해가 넘어가는 모습은 보지 못하고 옆으로 해는 지고 있었다. 공원에서 쉬며 사진도 찍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옆에는 왓포라고, 누워있는 불상이 있는 곳이었는데 입장료가 100밧이었다.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 태국에서 쓸 돈을 인출하지 못해 있는 돈만으로 지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조금 타격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라오스부터 계속 사원 구경은 제대로 하지는 않았는데, 우리가 불교신자는 아니라 그런지 크게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가지 않기로. 지나가다가 건물 안에 다리 부분만 보였는데 크긴 진짜 컸다. 나중에 찾아보니 42m에 높이 15m라고...
왓포를 나와 왕궁 담을 따라 걸었다. 왕궁도 500밧이라는, 이건 진짜 거금이라서 좀 보류 했다. 오늘은 시간도 늦어서 보지도 못할뿐더러, 뭔가 그냥 일단... 그래도 담 너머로 보이는 왕궁의 지붕이나 이런 것들이 멋있기는 했다. 갖가지 문양과 모양들이 있는데, 저걸 만든 사람들의 정성을 엿볼 수 있었다. 저건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무슨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를 생각해보니, 만약 이런 걸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는 사람은 그냥 ‘와-’하고 끝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곳은 진짜 가이드가 좀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왕궁 앞에 있는 공원을 걸어 우리는 다시 카오산로드 쪽으로 갔다. 해는 이미 다 지고 어두운 밤거리. 카오산로드의 밤은 낮과는 완전 달랐다. 시끄러운 음악소리 때문에 어떤 술 집 앞을 지나갈 때는 말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마사지가게에서는 길가에까지 의자를 쭉 내어놓고 많은 손님들의 발을 주물러주고 있었다. 우리는 맛집을 찾다가 실패해서 손수레에서 파는 팟타이 한 개를 사먹었다. 여기가 낮에 먹었던 곳 보다는 맛있었다. 역시, 진짜 길거리 음식이 짱이다.
오후 내내 걸어 다닌 피로도 풀 겸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30분에 120밧, 4,000원도 안 하는 가격이다. 엄청나게 많은 마사지샵 중에서 어떤 곳에 들어갈지 정하는 것도 고민이었다. 돌아다니다가 고심 끝에 안쪽 골목에 있는, 사람이 없는 마사지샵으로 정했다. 이곳의 마사지사들이 손님을 안받았으니 힘이 좋을 것 같아서... 의자에 앉아 마사지를 받는데 대박 시원했다. 일단 저렴한 가격에 부담이 없으니 기분도 좋아서 그랬을 것이다. 아내랑 나랑 해 주는 부위도 달랐는데, 나는 다리를 위주로, 아내는 발을 위주로 해줬다. 마사지가 끝나고 주는 차도 맛있었고, 과자도 한 통을 다 줬는데 정말 맛있었다.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했던 맛.
숙소로 가는 길에 옥수수를 사먹었는데, 이 맛도 신세계였다. 달콤하고 짭짤한 그 옥수수의 맛, 지금까지 먹어본 옥수수구이중에 최고였다. 아내도 정말 맛있어서 놀랄 정도. 카오산로드는 정말 방콕 여행의 진수를 보여주는 구나...
숙소로 돌아와서는 씻고, 아내는 먼저 잤다. 나는 앞으로 방콕에 있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 한참을 찾아보다 잠이 들었다.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은 참 많다. 그러나 항상 시간과 돈이 문제지. 3박 4일로 방콕 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우린 무려 11박 12일이다. 방콕에서만. 뭐, 여기저기 다 간다면야 가겠지만, 돈도 돈이고 피로도 엄청날 거다.
여행을 오기 전에 서양인들의 휴가에 대한 글을 읽은 것이 또 생각났다. 서양 사람들은 휴가를 가면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즐기다가 온다고.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뽕을 뽑겠다는 식으로 많은 곳을 가서 오히려 휴가가 끝나고 나서 더 피곤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까 길을 잘못 들어 어느 골목으로 들어갔는데, 그늘 밑에서 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기타를 치던 서양 사람이 생각났다. 나는 방콕에서 뭐하며 보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