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야기/독후감 IV

'왜 이 땅에는 악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서

inhovation 2016. 7. 24. 19:13

No. 180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톰 라이트 지음

노종문 옮김

IVP 펴냄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려고 생각하며 '니스 테러'(16.07.14)를 예로 들으려고 했다. 그런데 불과 열흘도 되지 않아 '뮌헨 테러'(16.07.22)가 발생했다. 이런 나쁜 일은 비단 유럽의 문제만이 아니다. 이미 세계 각국에서는 끔찍한 일들이 줄지어 일어나고, 우리나라 안에서 발생하는 각종 강력범죄만 손꼽아 봐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발생하는 악의 문제 뿐 아니라 쓰나미나 허리케인, 또는 불의의 사고 같은 것들도 우린 종종 악의 문제와 엮어서 생각하기도 한다. 이처럼 끊임없이 발생하는 '악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 하는 물음이 생길수도 있다. 직접 당한 것은 아니지만, 믿든 믿지 않든, 특히 믿는 사람의 경우, 이런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어쩌면 정상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는 아는 형님들 모임에서 한 형이 추천해줘서 읽기 시작했다. 제목부터 풍기는 약간 어려움틱한 느낌. 그리고 기독교 서적을 좀 읽어봤다 하면 한 번쯤 들어봤을 수 있는 유명한 신학자인 톰 라이트. 책의 얇기도 하지만 구성도 간단하다. 

1. '악'은 아직도 말하기 떠려지는 단어다: 새로운 악의 문제

2.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수 있는가?: 불의한 세계, 정의로운 하나님?

3. 악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

4. 악이 없어진 세상: 해방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5. 악에서 구하옵소서: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기

톰라이트는 책 역사적으로 다뤄온 악에 대한 관점과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악, 그리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지 차근차근 독자에게 설명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내용은 어렵지만 다소 잘 정리되어 있어서 엄청나게 어렵지는 않다. (그래도 쉽지는 않은 문제이다;;;)


<1장>

요즘에도 계속되고 있는 악의 문제지만, (그런데 사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악의 문제가 그쳤던 시기는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저자는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쌍둥이 빌딩 테러부터 시작하여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2003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말한 '악의 축' 발언. 1장에서 톰 라이트는 악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악에 대한 반응을 하는데 하나는 남 탓을 하는 문화를 만들어 내어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악을 자신에게 투사하여 이 모든 일에 대해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p. 29) 그러나 이 둘 모두 악의 문제에 대한 미숙하고 부적절한 반응이고, 그렇다고 무시하는 것 역시 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p. 30)


각 종교에서 역시 저마다의 악의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있는데, 불교에서는 현 세게가 환상이며 생의 목표가 이 생애를 벗어나는 것, 힌두교에서는 현생에서 사람과 동물을 괴롭히는 악을 전생에 그들이 저지른 관련지어 자신에게 주어진 업보(karma)에 순종하며 따름으로 잘못에 대해 속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은 알라의 메시지가 아직 모든 사람에게 전파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이 악한 상태에 있어 이슬람교를 온 세계에 전파해야 한다고, 이에 대해서는 평화적으로 믿는 다수의 모슬렘과 성전(聖戰)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소수가 있다고 한다.(p. 35-6)


1장에서 기독교의 방식은 뒤로 미루면서 이렇게 마무리 했는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악에 대한 통찰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을지, 이런 것들에 대하여 기독교적 비평을 제시할 수 있는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기독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성숙한 방식으로 이를 다루면서 창조자 구속자 하나님에 대해 더 깊고 현명한 신앙에 이를 수 있는지와 같은 질문이다.(p. 44)


<2장>

2장에서는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과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이 하나님이 악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보다는, 악에 대해 무엇을 행하실 수 있고, 행하고 계시며, 또 장차 행하려 하시는지를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성경이 악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와 왜 악이 존재하는지 정도가 설명 가능하다고 한다.(p. 49)


창세기에서 나타나는 노아의 홍수, 바벨탑, 아브라암 이후 가나안으로 가기까지 다양한 이야기, 그리고 시편에서 다루는 악에 대한 문제, 바벨론 포로 시기와 욥의 생애. 다양한 구약의 내용을 다루며 저자는 구약성경의 접근법을 정리하는데 먼저 악의 인격화된 힘인 사탄이 중요하지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고 엄격한 제약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은 전체적으로 분명히 드러나고 하나님은 그 문제들을 하나씩 처리하고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행하는 악은 피조물의 노예됨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인간의 반역은 피조물 자체를 망가뜨리고, 인간을 바로잡으면 세상이 바로잡힌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약에서는 절대로 철학자들이 원하는 깔끔하게 설명되는 정적인 세계 질서의 그림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 모호함이 바로 예수님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p. 81-4)


<3장>

3장에서는 복음서를 다룬다. 저자는 복음서가 어떻게 세상의 악이 최고조에 달했는가를 이야기하고 어떻게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장기적인 계획이 절정에 달했는지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복음서는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후 폭력적으로 죽임을 당했는가의 하는 이야기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p. 89-90) 예수님의 죽음은 우선 세상의 중요한 정치적인 악으로서, 세상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줄곧 치러오고 잇는 권력 투쟁의 결과이며, 또한 인간과 사회의 구조 배후에서 고소하는 어둠의 힘들, 창조 자체를 악하다고 고소하면서 창조주가 구속하시고자 하는 피조세계를 파괴하려고 계속 시도하는 힘들의 결과이다.(p. 94)


결론적으로 복음서는 에수님의 이야기, 특히 그분이 어떻게 죽게 되셨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창조주이신 여호와가 주권적이고 구원하시는 사랑으로 우주적이고 세계적이며 인격적이고도 초인격적인 형태의 악을 처리하는 이야기를 제시한다. 복음서 저자들은 우리에게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바라고 말한다. 그것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나 '지상의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재편하는 것'이 아니며, 그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면서 그것들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복음서들이 제시하는 것은, 악이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설명이 아니다. 또한 우리가 어느 정도 삶의 양식을 조절하여 악이 세상으로부터 신비스럽게 사라지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제안도 아니다. 복음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악을 처리하시는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p. 106)


<4장>

3장까지 오면서 결국 악에 대한 뚜렷한 처리 방식이나 뭔가 명확한 설명은 얻지 못한 듯 하다. 1장에서는 지난 세기 동안의 사람들의 악에 대한 인식, 2장과 3장에서는 각각 구약과 복음서의 관점에서 악에 대해 논했다. 4장에서는 저자는 조금 더 실제적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악이 없다는 것에 대해 상상하며 글을 전개해 나간다.


단순하게 테러리스트와 독재자가 없고, 공산주의와 부패가 없는 세상으로는 부족하다. 이런 생각은 이원론적 사고에 그쳐있기 때문이다. 폭격기와 지뢰가 사라지고, 공해 문제와 세상 절반이 갚을 수 없는 빚에 시달리는 문제가 없어진 세상을 상상하는 것도 충분치 않다. 악이 없어진 세상을 상상할 때 이런 것들이 포함될 수 있겠으나, 이런 상상들 속에는 '우리의' 삶의 방식은 '선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은 '악하다'고 말하는 이원론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p. 121)


미래 세계를 제대로 상상하기 위해서는 대중적 이미지의 '천국'이 아니라, 이사야와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상해야 한다. 성경은 천사가 날아다니는 구름낀 세계가 아니라 훨씬 구체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에서 한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간략히 요약해보자면 이렇다.(p. 133-4)

-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모여 하나의 도시를 이룬 모습

- 그 도시는 어린양의 신부인 새로운 예루살렘

- 이 공동체는 모든 인간 이하의 행태들과 모든 종류의 비열하고 비인간적인 행동이 추방된 공동체

- 보석들과 황금과 완전한 비율로 지어진 건물들은 이 공동체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공동체임을 가리킴

- 이곳은 치유의 장소로서, 현재의 치유뿐 아니라 신비한 약속의 말씀을 따라 미래의 치유가 일어날 장소


나도 그동안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그런지 상상은 제대로 안되지만, 톰 라이트는 나와 같은 이런 독자를 위해 이런 상상을 하기 위한 중간 단계의 과제 5개를 제시한다. 바로 현재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영역들이다. 바로 기도, 거룩함, 정치와 제국, 형법 체계, 국제 관계 속의 분쟁들이다.


특히 형법 체계에서는 회복하는 정의를 포용하는 일을 제시하며, 범죄자를 주위의 가족, 친구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와 피해자를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한 자리에 모으고, 벌어진 일을 공개적으로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함께 나아갈 길을 찾고 합의를 도출해 가기를 제시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인 것은 인정하고 있으나 건강한 모델이기 때문에 제시하고 있다. 또한 국제사회 수준에서는 악을 무시하거나 맞대응하여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 것이 아닌 십자가의 메시지와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p. 143-6)


4장의 결론으로는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그저 악과 하나님의 정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해결하라는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십자가와 부활의 성취를 믿으며,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상상할지 배우며, 이를 위해 기도와 거룩함과 더 넓은 세상 속에서의 행동을 통해 이 둘을 하나로 결합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5장>

드디어 마지막 장이다. 지금까지 악에 대해 많은 논의들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5장에서는 용서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인 용서가 아닌 진정한 용서를 말하고 있다. 기승전 용서로 끝나는 이 책, 악을 그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는지 반문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은 감정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의 '사랑'은 일차적으로 행동이지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은 종종 행동에 뒤따르게 되며, 그 순서가 거꾸로 되지 않는다.(p. 187)


그러나 악에 대해서 우리가 용서하기 전에는 먼저 악을 치욕적으로 만들고, 죄를 범한 사람과 적절한 관계를 재개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한다. 또한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제시한 방법대로, 개인적인 수준에서 복수하거나 곪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서 말하고, 안되면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그래도 안되면 하나님 백성의 총회 수준에서 이를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p. 177-9)


톰 라이트는 글을 마무리하며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언젠가 알게 될 것이며, 자궁 안의 아기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가 부족하여 바깥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것 처럼, 우리 역시 지금은 완전히 이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약속을 받았는데, 이 약속은 용서가 초석이 되어 화해가 모든 것을 굳게 하는 세계를 만드실 것이라는 것이다.(p. 191) 우리는 악으로부터 구원을 맛보려고 미래를 기다를 필요가 없으며, 지금부터 이런 삶의 방식을 시작하라는 초대와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 우리는 삶 속에서 용서의 의미를 배워야 하고, 이를 배우면 배울수록 모든 일이 잘될 것이며, 고통받는 세상 가운데서 미리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과업을 더 잘 수행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p. 192)



책 내용이 어렵기도 하고, 저자의 말들을 정리해 봤는데, 본문에서도 썼지만,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는 '기승전 용서'이다. 그러나 이 용서라는 단어를 도출하기까지의 기승전, 악에대한 사람들의 인식, 구약과 복음서의 관점으로 바라본 악, 악이 없어진 세계를 다루는 것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악에 대해 심도깊은 사고 없이는 우리는 악을 악으로 정의하고 용서하는 일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 '예수님과 함께 한 저녁식사'라는 책에서 주인공이 예수님을 만나,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과 착한사람의 위치를 종이에 표시하게 하고 주인공의 위치는 어느 곳에 있는지 표기하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은 적당한 중간쯤 표시했지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완전한 선의 개념은 작은 종이 그 어떤 곳도 아닌, 종이를 세로로 세웠을 때 하늘 끝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에서도 논했지만,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입에 담기도 힘든 악을 저지른 사람과 우리를 구분짓는 이원론적 오류를 범하곤 한다. 물론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에서는 정말 나쁜 일이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하나님의 기준은 저 높은 곳에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하고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구분짓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통해 저들을 변화시켜야 하는 사명이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일을 당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강요만 하기는 참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개인의 생각이 공동체로, 공동체가 국가로, 국가가 세계로 확산되어, 전 세계에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이상을 공유하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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