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야기/독후감 IV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황제는 카피라이터

inhovation 2016. 1. 21. 13:08

No. 177

로마인 이야기 5 -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펴냄


  길고 긴 카이사르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영어로는 시저(Caesar), 어렸을 적에 게임(시저3)을 통해 접하던 사람의 일대기를 이렇게 책을 통해 모두 다 읽으니 뭔가 뿌듯하다. (상)권에서 젊은 카이사르의 이야기는 활력이 넘치고 그런 느낌이었다면, (하)권에서 만나는 카이사르는 젊을 때의 지혜가 한층 더 성숙된 느낌이다.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오.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카이사르) / 현 체제 타도를 목표로 삼고 있는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중심의 현 체제 고수파를 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말살되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조국이 내전 상태가 되더라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쪽을 택했다는 점에서는 카이사르도 술라와 다를 게 없었지만,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에서는 술라와 큰 차이를 보였다." (p. 75)


  이번에도 책의 여러 곳에서 카이사르의 성품과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사는 카이사르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독불장군마냥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남들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동화하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카이사르는 자신은 자기 생각대로,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생각대로 사는 것을 기본으로 여기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암살을 당하긴 했지만, 남들의 생각을 인정해주고 하는 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도 너무나도 견고하고 확고해서 반대파가 생기지 않을 수는 없었나보다.



"단순히 재능 있는 사람과 천재를 구별해주는 것은 지성과 정열의 합일인데, 폼페이우스에게는 그것이 모자랐다." (p. 194)


  폼페이우스의 죽음 이후에 나온 부분인데, 그의 삶을 평가하는 영국의 한 연구자의 견해이다. 실례로, 디라키움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카이사르는 제일 나중에 전쟁터를 떠났다. 반면에 파르살로스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는 가장 먼저 전쟁터를 떠났다. (문제가 있을 때 함께 남아줬던 팀장과, 먼저 떠나버렸던 또 다른 팀장이 생각나는...)



  내전이 마무리 되면서 클레오파트라와 두 달 동안 나일 강을 유람하며 휴가를 즐긴 카이사르의 이야기(p. 213)도 흥미로웠다. 본토 문제와 이집트 지방 정리까지 끝낸 후, 알레시아 공방전부터 파르살로스 회전까지 5년 동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던 카이사르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천재에게도 스트레스는 쌓이는 법이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자제력은 긴장과 이완을 스스로 제어하는 능력이라고. 이런 면에서 본다면 카이사르는 일할 땐 일 하고, 놀 땐 노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p. 219)


“주사위는 던져졌다”와 같은 카피라이트이다. 소아시아 지방을 공략하던 중에 파르나케스에게 승리를 거둔 후 원로원에게 보낸 전과 보고에는 저렇게 단 세 마디만 쓰여 있었다고 한다. VENI, VIDI, VICI(베니, 비디, 비시). 말보로 담배갑 앞뒤에 있는 문장이라고 하는데, 카이사르는 정말로 카피라이터로서의 재능도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다.


  이런 언어적 마술은 그가 제10군단을 대했던 말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제10군단이 종단 거부를 선언하자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전우 여러분(콤밀리테스)’이아닌 ‘시민 여러분(퀴리테스)’이라고 불렀다.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진 않지만, 군사들은 울음까지 터뜨리면서 다시 병사를 시켜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pp.234-5) 제10군단이라는 자부심으로 우쭐대던 병사들을 한 순간에 ‘말 한마디’로 눌러버린 카이사르였다. ‘퀴리테스’ 사건 이후 제10군단에게는 보너스도, 급료인상도 없이 다시 전쟁에 참여시킬 수가 있었다. 카이사르가 ‘문장은 어휘 선택으로 결정된다’고 했는데,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서도 카이사르의 생각을 톡톡히 읽어낼 수가 있었다.



  이 외에 카이사르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면 우선 달력을 개정한 것을 꼽을 수 있다. 기원전 7세기에 제2대 왕 누마가 정비한 태음력은 1년 간 달이 차고 이우는 데 따라 열 두 달로 나누고 1년의 날 수는 355일이었다. 그리고 남은 날 수는 몇 년마다 한 번씩 한 달을 늘리는 방법으로 조정했다. 그러나 기원전 1세기에는 이렇게 해도 계속해서 생기는 차이가 누적되어 달력과 계절 간 석 달 정도의 차이가 생겼다.

  카이사르는 문명 통합의 첫 걸음으로 이집트인 천문학자와 그리스인 수학자를 시켜 달력 개정을 시작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시간을 365일 6시간으로 계산하고, 365일을 1년으로, 1년마다 생기는 6시간의 오차는 4년에 한 번씩 2월 23일과 24일 사이에 하루를 끼워 넣어 청산하는 식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4년에 한 번씩은 2월 29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계산법을 율리우스력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지금까지 쌓인 오차 청산 문제가 있는데, 기원전 46년 한 해만 11월이 끝나고 12월 시작 전에 3개월을 ‘삽입 제1월, 삽입 제2월, 삽입 제3월’으로 넣어 율리우스력을 기원전 45년부터 시작하게끔 조정하였다. 그리고 이 율리우스력은 서기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다시 개량할 때까지 1627년 동안의 기준이 되었다. 16세기 후반 천문학의 발달로 1년이 365일 5시간 48분 46초였기 때문에 11분 14초만 정확해졌을 뿐이고 결국 그레고리우스력도 율리우스력과 같은 개념인 것이다. 엄청난 천재적인 사람을 데리고 이 작업을 했겠지만, 그 결과가 매우 정확하고 편리한 것을 보면 문명 통합을 위한 기준을 만들 생각을 한 카이사르가 대단해 보인다.



  이후에도 율리우스는 정치(원로원, 민회, 호민관, 종신독재관), 금융, 행정, 사법, 사회 개혁 등 로마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새로운 로마를 만들었다. 특히 법률 부분의 개혁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는 “인간의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종교에 맡긴 유대인, 철학에 맡긴 그리스인, 법률에 맡긴 로마인. 이것만 보아도 이 세 민족의 특징이 떠오를 정도다.”라고 했는데, 로마가 그 넓은 땅을 통치하기 위해서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종교는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행동 원칙을 바로잡는 역할’을 할 수 없고, 철학은 그것을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지만, 법률은 종교를 달리하거나 철학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인간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규범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지방의 다양한 종교, 다양한 지적수준을 가진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잘 통치하려면 어쩌면 법률이 짱이었을지도...



  이와 같은 로마 정비를 마치고 율리우스는 아래와 같은 특권을 얻었는데 정말 어마어마 하다. (pp. 342-4)

1. 종신 독재관 취임.

2. 집정관도 겸임 가능.

3. '임페라토르'호칭 상시 사용 가능(개선장군에게만 일시적으로 부여)

4. '조국의 아버지'칭호. 로물루스를 로마의 건국자, 카이사르를 로마의 두번째 건국자

5. 자줏빛 망토 상시 착용 가능(개선장군이 개선식 당일만 착용)

6. 월계관 상시 착용 가능

7. 프라이펙투스 모룸(윤리 감찰관) 단독 취임

8. 원로원 회의장에서 집정관보다 한 단 높은 곳에 앉음

9. 극장이나 경기장 관중석 중앙 특별석

10. 카피톨리노 언덕 유피테르 신전 입구 왕정 시대 임금들 입상 사이에 자신의 입상을 놓음

11. 원로원 회의에서 가장 먼저 발언 가능

12. 공무원 임명권(후 민회 승인, 원래는 민회가 선출권을 갖고 있었음)

13. 거부권 및 신체 불가침권

14. 기념화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옆 얼굴 새김

15. 달력 개혁 후 제5월(퀀틸리스)로 불린 7월이 카이사르가 태어난 달인 것을 기념하여 룰리오(luglio) 영어로(July)로 부름(로마시대에는 3월이 시작이라 7월을 퀀틸리스라고 부름)

16. 카이사르 정치 기본정신인 '관용'을 신격화 하여 '카이사르의 관용'(클레멘티아 카이사리스)이라고 명명한 신전 건립 인정



  그러나 이런 특권을 모두 오래 누릴 수는 없었는데, 바로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암살을 당했기 때문이다. 암살 에피소드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카이사르의 마지막 명 대사(?) “브루투스 너 마저...”의 대상이 카이사르의 평생 애인인 세르빌리아의 아들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아닌 '데키우스 브루투스‘일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로마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를 가지고도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20세 초반부터 카이사르 밑에서 전쟁에 참가한 사람으로 청년 브루투스로 불린 사람이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제1상속인이 사양한 경우 상속받게 될 두 번째 상속인으로 지정된... 카이사르가 속으로는 많이 신경 써 준 것 같은데, 왜 죽였을까?



  여튼, 카이사르가 죽고 그를 화장하는 장면에 대한 내용이 나왔는데, 역시 역사에 남을 인물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범상치 않다.


"유해를 태우는 불길이 꺼져갈 무렵, 이번에는 세찬 비가 쏟아졌다. 카이사르의 유해를 태운 재는 누군가가 미처 긁어모으기도 전에 빗줄기에 씻겨가버렸다.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을 평정한 뒤에 황제묘를 만들었지만, 황제묘에 맨 먼저 들어가야 마땅한 카이사르를 거기에 매장할 수 없었던 것은 유골이 빗물에 떠내려가버렸기 때문이다. / 따라서 카이사르는 무덤이 없다. 카이사르의 시신을 태운 재는 로마의 땅 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는지도 모르고, 완비된 하수도를 통해 태베레 강으로 들어가 그대로 지중해와 섞여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범한 무덤 따위는 없는 편이 카이사르한테는 어울리는 것 같다." (pp. 398-9)

 

"경기대회 마지막 날 밤, 커다란 혜성이 로마의 밤하늘을 가르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카이사르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후세의 천문학 연구에서 이때 나타난 혜성은 '핼리 혜성'으로 밝혀졌다." (p. 420)


  이렇게 카이사르의 화장까지 끝나고 나니 숨 가쁘게 달려온 그의 삶을 읽은 나도 뭔가 탁- 하고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영화의 결말에 엔딩크레딧까지 다 본 느낌. 가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오는 쿠키영상이 있는 영화들이 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편은 바로 딱 이런 영화 비슷하다. 그의 죽음 이후에서도 약간의 상황 정리를 해 주고 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카이사르의 마지막 애인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부분이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물론 이집트의 민중언어까지 이해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언어를 구사하는 재능(탤런트)이 반드시 지성(인텔리전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p. 479)


  시오노 나나미는 클레오파트라를 마지막으로 이렇게 평가했는데, 카이사르가 죽고 나서 유언에 자신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다는 것에 화가 나서 안토니우스를 부추겨 전쟁을 하게 한 것이다. 유언에 없으니 나는 내 맘대로 할 거다, 뭐 이런 느낌으로 클레오파트라가 마지막에 좀 막 나갔다. 그런데 로마와 이집트의 관계를 고려해서 자신의 사후에 발생할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유언장에 카이사르가 클레오파트라를 위해 단 한마디도 넣지 않았던 것인데 그녀는 이것을 몰랐던 것이다. 결국, 일은 모두 망치고,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독사에 물려 목숨을 끊고 만다.



  이것으로 길고 긴 이야기,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하)는 모두 끝이다. 허허. 재미있게 잘 읽었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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