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78
로마인 이야기6 -팍스 로마나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펴냄
드디어, 로마인이야기 6번째 책이다. 팍스 로마나. 팍스 Pax는 평화 Peace이다. 이 때만큼 로마가 평화로운 시기가 없었다는 의미이겠지. 4, 5권이 카이사르의 이야기를 다루고 책 제목도 카이사르 상, 하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 6권의 책 제목은 '팍스 로마나'이지만 제목과는 달리 아우구스투스 황제 단 한 사람의 이야기만 다루고 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로마의 평화가 확립되어서 완전 미스매칭되는 건 아니고. 똑같이 한 사람을 다뤘다 하더라도, 상하를 합친 분량의 1/3이나 1/4 정도밖에 되 보이지 않는 6권. 그래도 재미는 카이사르 이야기가 더 있었던 것 같고, 읽는 속도도 왠지 훨씬 두꺼운 카이사르를 더 빨리 읽은 것 같다. 평화는 조금 따분했나.
책의 가장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기원전 31년 9월, 그리스 서해안 앞바다에서 치러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은 패배했다." (p. 11)
전쟁 이야기다. 길고 지루했던(그러나 독자로서는 재미있었던) 전쟁이 이제 마무리되고 로마는 점차 안정을 찾아나간다. 그리고 책의 가장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지.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팍스'(평화)였다." (p. 379)
아우구스투스 집권 시절에 로마에 진정한 평과가 찾아들었음을 알게 해 주는 마무리다. 이렇게 6권 팍스 로마나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구축해 가는 아우구스투스의 지혜들을 서술했다.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제6권의 주인공이 될 아우구스투스는 제3권에 등장한 인물들 중에서도 유난히 광채를 발휘한 술라처럼 통쾌하지도 않고, 제4권과 제5권을 통해 압도적 존재를 과시한 카이사르처럼 유쾌하지도 않다."
책 내용 전체적으로 사실 멋진 전투도 없었지만 '팍스'를 이뤄가기 위해 또 다른 전쟁을 치른 아우구스투스의 이야기를 저자는 단 한 번도 따분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난 사실 상대적으로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다. 말했듯이 카이사르에 대해 쓴 두 권의 책 보다 훨씬 얇지만 말이다. 그러나 '팍스'를 실현해 나가는 아우구스투스만의 방식, 분명히 카이사르와는 다른 방식이 흥미롭기는 했다. 또 다른 재미라고 할까.
우선 카이사르와 다른 점들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었다.
1. 일하는 방식.
"아우구스투스는 유일한 승자가 된 뒤에도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오랜 시간을 들여 한 가지씩 권력을 수중에 넣어 결국 모든 권력을 장악한" 반면, 카이사르는 유일한 승자가 되자마자 당장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고 억지로 혁명을 추진한 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p. 88)
조금 뒤에 '죽음' 파트에서도 이야기하겠지만, 아마 카이사르 암살의 주된 사유가 아닐까 싶다. 급진파 같은 카이사르는 아무래도 반대세력이 생길 수 밖에 없겠지. 롱런한 아우구스투스는 야금야금 슬금슬금 업적을 이뤄나갔고. 물론 뭐 급진파라고 해서 무조건 '암살'당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반대파가 많아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 듯. 누구의 업무 처리 방식이 더 낫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카이사르는 그만큼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뤄낸거고, 사실 어떻게 보면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가 이제 하려고 했던 일들을 평생에 걸쳐 했기 때문에...
2. 성격
"아우구스투스는 누구한테나 마음을 여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황이 괴롭든 즐겁든 관계없이 항상 주위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카이사르의 그 밝고 쾌활한 성격은 주변 사람들까지 끌어들여 분위기를 명랑하게 만들었다. 그런 카이사르와는 반대로 아우구스투스의 주변에는 언제나 정적이 흐르고, 사람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를 지켜보곤 했다. 그것이 아우구스투스의 대인관계였다. 카이사르가 사람들을 감동으로 끌어들인다면, 아우구스투스는 사람들을 감탄으로 가득 채웠다." (p. 292)
감동과 감탄. 아무래도 카이사르는 달변가였을 듯. 뭐,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같은 카피라이트를 만들어 내는 카이사르를 보면 말을 정말 잘 하는 사람일 것 같긴 하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줘서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 아우구스투스는 조용하지만 꾸준하게 일을 추진해 나가면서 결과물이 나왔을 때 사람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그런 스타일인 듯.
3. 죽음
카이사르는 그 삶이 다사다난하고 전쟁터에서 주로 보내서 그런지 암살을 당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평생 이룬 업적, '팍스'를 개인적인 죽음에까지 실현시킨 듯 하다.
"티베리우스와 이야기한 지 얼마 후,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의 품안에서 죽음알 맞이했다. 그가 평생 동안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평온하고 조용한 죽음이었다." (p. 373)
아무래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암살 직후 자신이 황제가 되어 평생 암살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암살 당할 만한 건덕지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몇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도 있었다.
1. 인사정보 담당관, 노멘클라투라
"로마의 유력자들은 옛날부터 외출할 때 '노멘클라토르'라는 노예를 항상 동반했다고 한다. 유력자니까 포로 로마노를 걷고 있을 때 와서 인사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다 기억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이걸 기억해주는 사람이 '노멘클라투라'라는 것이다." (p. 99)
여기서 노멘은 '이름'이란 뜻이고, 클라토르는 '일러주는 자'라는 뜻이다. 그래서 노멘클라투라는 이름을 알려주는 사람인 것이다. 유력자가 지나가는 동안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 같으면 이 노예는 얼른 주인에게 상대방의 이름을 속삭이면서 근황도 대강 이야기 해 주어야 했다. 그래서 항상 인맥 관리를 잘 해서 집정관 후보도 되고 선거운동도 하고 하는 식으로 유력자는 노멘클라투라를 활용했던 것이다. 사실 노예라고 하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흑인노예' 이런 느낌보다는 약간 비서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심지어 노멘클라투라는 지도층에게는 필수적인 존재였는데, 인사관리 정보통인만큼 연회의 자리에서 손님들의 자리까지 결정했다고 한다. 유력자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이 노예에게 팁까지 주고 유리한 자리를 주선받기도 했다고 하니 말이다.
이 부분이 너무 재미있어서 지하철에서 읽다가 혼자 빵 터졌다는...ㅎㅎ
2. 2000년 전에도 있었던 '독신세' (p. 158-70)
아우구스투스는 이 시기에 사람들이 자식을 적게 낳으려는 풍조에 대한 대책도 세웠다. 자식을 적게 낳으려는 이유는 지금 이 시대처럼 삶이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기원전 1세기의 로마가 가난하고 장래에 희망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니. 그래도 기원전 2세기까지만 해도 자식을 10명씩 낳고 그랬는데 카이사르 시대에는 2-3명으로 줄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결혼을 안한 사람들도 속출했다. 잘 살게 되니까 독신으로 지내도 노예들이 집안일을 다 해주고 내전도 없으니까 평화롭기까지 하고...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방지하려고 간통 및 혼외정사에 관한 율리우스 법, 정식 혼인에 관한 율리우스 법을 만들었다. 평화로운 시절에 자연스레 남녀 간의 성적 욕망도 적절한 수준에서 결혼 제도 밖에서 이뤄졌을 텐데, 이렇게 되면 사실상 결혼 제도 밖에서의 성적 욕망 해소를 원천봉쇄하여 이를 해결(?) 하려면 반드시 결혼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물론 결혼의 주 목적이 이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여자의 경우 '독신세' 같은 재산상의 불이익도 생겼는다. 자식이 없는 50세 이상 여성은 상속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5만 세르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갖고 50세를 넘게 되면 유지할 권리도 잃어버린 채 다른 사람에게 이를 양도해야만 하게 되었다. 2만 세르테르티우스 이상의 재산을 가졌다면 50세 이상의 남편을 찾아 결혼하기 전까지 해마다 1%의 수입도 국가로 바치게 되어있었다.
작년엔가, 우리나라에도 작년엔가 독신세 논란이 있었는데,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2천 년 전에 있었던 이 독신세를 따라한 것 같긴 하다. 물론 지금을 평화로운 시절이라고, 장래가 보장되고 하는 시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절대적으로 '잘 살게' 되긴 했으니깐 말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결혼을 안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혼자 사는 게 더 편해서이긴 하니깐.
3. 중간점이 균형은 아니다
출산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정책을 논하면서 '균형 감각'에 대한 서술이 있었는데 이 부분이 꽤 흥미롭고 뭔가 책 전체로 봤을 때 나에게 남는 부분이었다.
"균형 감각이란 서로 모순되는 양극단의 중간점에 자리를 잡는 것은 아니다. 양극단 사이를 되풀이하여 오락가락하고, 때로는 한쪽 극단에 가까이 접근하기도 하면서, 문제 해결에 가장 적합한 한 점을 찾아내는 영원한 이동 행위가 아닐까. / 자유와 질서는 서로 모순되는 개념이다. 자유를 지나치게 존중하면 질서가 파괴되고, 질서를 지키는 데 지나치게 전념하면 자유가 사라진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양립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자유가 없는 곳에는 진보가 없고, 질서가 지켜지지 않으면 진보는 커녕 오늘의 목숨조차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p. 169)
균형(감각)이라는 것이 중간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이 중간점을 사이에 두고 오락가락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에 공감하였다. 생각해보면, 긴 장대를 들고 외줄타기 하는 사람도 사실 중간점을 딱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좌우로 흔들리는 그 몸을 왔다갔다 움직이며 균형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와 질서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 베트남에서 느낀 점인데, 오토바이가 정말 '겁나' 많고 복잡해 보이지만, 그런 무질서 속에서도 질서가 지켜지며 사고가 안나는 것을 보면, 질서만을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가끔 사고가 나기도 한다.) 우리의 인생도 이런 것 아닐까. 균형을 지키려고 수 많은 경험을들 하는데, 그 과정들이 이쪽으로 가보기도, 저쪽으로 가보기도 하는 것들. 어떻게 보면 방황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 방황을 통해서 결국은 균형을 찾아 나가는 것. 이게 인생 아닌가 싶다.
4. 팍스
사실, 이게 이 책의 핵심이다. 각 영역들에 대해 죽- 나열하여 부분부분적으로 평화에 대한 서술이 있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평화'에 대한 부분은 이 부분 같다.
"이 시기에 제국 전역이 누린 '평화'는 아우구스투스의 수많은 개혁이 처음부터 완벽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개혁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 어떤지를 그가 하루도 쉬지 않고 감시했기 때문이다. 통치도 가도와 비슷하다. 끊임없는 유지와 보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인식력, 문제점을 깨닫자마자 당장 보완하고 수정하는 유연한 행동력,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경제력 가운데 하나만 부족해도 통치는 기능을 제대로 바뤼할 수 없게 된다." (p. 308)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다시 한 번 더 간략히 요약하면, '처음부터 완벽하진 않더라도 끊임없는 감시와 보완'인 듯 하다. 하긴, 처음부터 완벽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천재들의 머릿 속에서나 나오는 것이겠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이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겠다. 중학교 1학년 급훈이 갑자기 생각났다.
'고귀한 것은 열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성에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통치를 지속적으로 보완, 발전시켜 나가 로마의 평화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죽기 조금 전, 나폴리 만을 유람할 때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알렌사드리아에서 방금 도착한 상선의 승객과 선원이 배에서 쉬고 있는 늙은 황제를 알아보고 합창이라도 하듯 소리쳤는데
"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것도. /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는 것도. / 당신 덕택입니다. 우리가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p. 378-9)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평화 속에 그의 영원을 맡기고 로마인의 곁을 떠났다.
+ 덧
5. 속주 통치 방식과 유대 기독교
이건 책을 읽을 때는 그냥 단순히 흥미로웠던 부분인데 교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금 알게 된 부분이다.
카이사르 이야기에서도 나왔는데, 로마의 속주 통치 방식은 존중과 자율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의 시스템을 크게 손대지 않고 종교에 대해서도 특별한 강요를 하지 않는다고. 이는 유대지방을 통치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유일신'만'을 믿는 기독교의 특수성 때문데 조금 다르긴 했지만, 이런 로마의 통치 방식 때문에 유대지방의 기독교가 큰 탄압은 당한 것 같지는 않다. 성경 말고 적어도 로마인 이야기만 읽었을 때. 물론 여러 탄압들이 있었겠지. 성경에서 로마 군사가 5리를 가라고 할 때 10리를 가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있고, 로마 통치를 벗어나려는 그런 이야기들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런 성경의 메시지와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접한 유대 통치 방식이 조금 다른 것 같아서 교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둘 다 맞는 말이라는거다. 그러면서 (꼭 정말 그럴지는 확인해 본 것은 아니지만) 시대가 기독교를 잠식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기독교인들도 비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거를 다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만들고, 결국 세상과 동화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교회 용어로 하면 사단의 방식?ㅎ) 분명히 예수님은 '화평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라'(눅12:51)고 말씀하셨는데, 뭐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가치를 붙들고 살면 세상 속에서 화평하기'만'은 힘들 것도 같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팍스가 예수그리스도의 가치를 흐리게 할 수 있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경계해야 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나눔을 하고 생각해 보니 나는 할 거 다 하게 하면서 세상에 서서히 동화되어 가고 있지는 않았나 돌아보게 되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가치를 무시하지는 않았나. ... 생각지도 않게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깨달은 신앙적 통찰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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