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야기/독후감 III

고민 없는 세대, 고민하는 힘

inhovation 2016. 3. 3. 21:41

No. 152

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사계절 펴냄

 

  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수도 없이 직면하지만 애써 회피해버린 삶의 물음들에 대해 고민하고 싶어진다. 내가 그동안 직면했던 수많은 고민들, 그러나 회피해버렸던 고민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그러한 고민들에 대해 남들이 주는 단순한 해답을 찾아 받아들여버린 것은 얼마나 많은가. 아니면 고민에 대한 해답도,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저자는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것을 제안한다. 비유하자면, ‘수학의 정석을 풀 때 답을 보지 말고 끝까지 고민해서 풀라.’는 느낌이랄까?

 

  저자 강상중 교수는 재일교포 2세대로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사람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면서 살아왔지만, 지금 우리들이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고민’을 하며 자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 소설 작가 ‘나쓰메 소세키’와 독일의 ‘막스 베버’의 글을 통해 삶의 고민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며 기나긴 고민의 시기를 지나왔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우리들에게 고민하라고 말한다. 고민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된다며.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서장. 지금을 살아간다는 고민

1. 나는 누구인가?

2.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3. 제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4. 청춘은 아름다운가?

5.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6.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7.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8. 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9. 늙어서 최강이 되라

 

  각 장의 제목들은 우리에게 결코 생소한 고민이 아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 이상은 반드시 해 보았을만한 질문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세상을 살고 있는지 되돌아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더 많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는 삶의 힘겨운 시기들은 회피해버리기만을 바라고 문제와 고민 누군가가 해답을 제시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나 알다시피 삶에 있어서 이런다고 해서 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고민에 해답도 내리지 않는다. 결국 스스로가 이런 삶에 맞서 고민하고 헤쳐 나가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 있어서 강상중 교수의 ‘고민하는 힘’은 고민 없이 살아온 세대에게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힘을 얻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책의 내용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전혀 관심이 없었던 단어인 ‘청춘’ 저자도 말했지만 지금 이 시대에 청춘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별로 사용하지 않고, 심지어 촌스러운 느낌까지 드는 단어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청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하면 봄에 해당하는 것이 청춘시절이겠지요. 사실 나는 사계절 가운데 봄이 가장 힘듭니다. 졸업식과 입학식에서 보듯이 인간이 무엇인가를 졸업하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계절이 봄입니다. 그러나 모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곁눈질하면서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봄이라는 계절은 어떤 의미에서는 잔혹한 계절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p.82)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도움이 되든 그렇지 않든, 사회에 이익이 되든 그렇지 않든 ‘알고 싶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같은 것을 솔직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p.85)

  우선 청춘은 항상 혈기왕성하고 지칠 줄 모르는 밝은 시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리고 마치 이것이 봄과 같은 계절이라고 생각했는데 봄이 따뜻하기만 한 계절이 아니라고 바라본 것이 너무 새롭게 다가왔다.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청춘은 봄이고 봄은 생명의 계절인데 지금의 청춘, 젊은이들-물론 저자는 청춘을 단지 나이의 ‘젊음’이라고 바라보지는 않지만-은 힘겨운 시기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의 계절, 봄 안에 감추어진 잔혹함 때문이라니.

  또한 청춘은 의미의 본질을 묻는 시기라고 한다. 이 시대의 젊은 청춘들이 세상의 흐름에 따라 얼마나 많이 휩쓸려 다니는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하고 마는,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는 불안함과 함께 남들보다 더 하려는 청춘들. 물론 나도 예외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요구하는 기준과 가치관에 맞춰서 자신을 그 기준에 맞추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런 것은 아닌가. 


  청춘에 대한 고민 말고도 또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종교에 대한 것이다. 제목은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이지만 꼭 기독교나 특정 종교를 겨냥해서 쓴 글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고민하며 읽었다.

 

  신앙을 의미하는 ‘rilig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religio’로, 제도화된 종교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습니다. 즉 종교라는 것은 ‘개인이 믿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믿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생활 그 자체였기 때문에 종교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설득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무엇을 믿으면 좋을까?’라는 물음 자체가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매우 행복한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행복한지에 대해 말하자면,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사건에 대해 하나하나 의문을 느끼거나 스스로 의미를 찾아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 의미를 자동적으로 공급해 주었던 것이지요. 달리 표현하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보호막에 의해 보호를 받고 영양분을 받으며 살아가는 태아와 비슷합니다.(pp.98-99)

  이 부분을 읽고 나서는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 속 깊이 다가왔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고민들이 있는 것이 내가 지금 믿고 있는 종교, 기독교는 내가 속한 공동체의 생활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온전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면, 그리고 그런 공동체 속에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라왔더라면 삶의 고민들에 대해 의문을 던지기보다 ‘의미를 자동적으로 공급’ 받았을 텐데 말이다. 친구에게 이 말을 해 주니 친구는 마치 '부산 사람이 롯데를 응원하는 이유가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라, 부산사람이기 때문에 그냥 롯데를 응원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정말 멋진 표현이고 비유인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속한 모든 공동체가 기독교적 공동체일 수는 없겠지만, 교회에서 속해있는 나의 공동체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아니, 어쩔 수 없는 상황과 역량의 한계인가?) 이런 면에서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라기보다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지체들이 있는 ‘공동체’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책을 읽고 나서도 ‘고민하는 것이 어떻게 힘이 되는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해 보았다. 바로 고민을 통해 자신이 내린 해답, 자신만의 결론이 있다면 급박하게 변해가는 시대의 물결 속에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닐까 싶다. 마치 요동치는 바다 위에 닻을 내리고 있는 배는 물결에 따라 춤을 춰도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처럼.

  나의 경우도 이런 적이 있는데, 2007년 정도부터 심각하게 어떤 문제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었다. 처음에 그 고민은 단순하였지만 해가 거듭해 갈수록 내 숨을 조여 올 정도로 고민의 정도는 깊어졌고 심해졌다. 주변 사람들과도 함께 모여 고민을 나눠보기도 하였지만 서로 마음의 공감과 약간의 위로만 될 뿐 문제는 전혀 해결할 수 없었다. 사실 내가 그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그 고민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면 피해버리는 것도 해결중의 하나다.그러나 네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통해 ‘더 고민’하면서 해결책을 찾아보며 공부해 보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나서 2년을 더 버틴 것 같다.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 고민 가운데서 내가 해답을 내리고 끝을 낼 수 있는지 심각하게 ‘더 고민’했다. 그렇게 5년 넘게 지내온 다음 나는 나름대로의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해답을 끌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정답’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내가 5년 넘게 씨름해 온 고민의 결론이고 내 마음이 평안해 지는 ‘나만의 정답’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그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것이 ‘고민하는 힘’ 아닐까?

 

  이제 우리는 삶에 다가오는 문제들에 대해 피하기보다 직면하는 노력을 해 보아야겠다.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가오는 삶의 질문들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겠다. 바로 이런 고민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오히려 힘이 되니까 말이다.


2013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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