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13 미국 서부

<미국여행 15일차> 베스트바이에서 환불

inhovation 2016. 9. 26. 00:00

2013년 1월 25일 금요일

 

  아침에 일어나긴 했는데 운동을 안갔다. 미국에서 보름, 벌써 풀어지는 건가 싶어 기분이 조금 안좋기도 했다. 결심하고 했으면 그대로 다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역시, 삶에서의 자신과의 싸움은 한 번으로 끝이 나지 않는 것 같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었고 오후에 가게에 나가서 일을 도와드리기로 했다. 그동안의 밥값을 이라고 해야 할까? 다음주도 일주일 내내 샌프란시스코에 가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바쁜 주말 일정도 다 뺐다. 금, 토, 일, 3일간은 가게 일 보기. 오전엔 집에 있고 점심 즈음에 전화를 드리면 픽업하러 오신다고 하셔서 오전에는 밀린 블로그, 샌프란시스코 계획 등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점심으로는 유부초밥을 해먹고.



  가게를 나가려고 전화번호를 찾는데 전화번호를 적어둔 메모지가 보이지가 않았다. 연락할 방법이 없네. 집에 있는 전화기 전화 목록도 항상 깨끗하게 지우셔서 그 어디에서도 핸드폰 번호를 알 수가 없었다. 어쩔수 없지. 집에만 있기도 따분한데 밖에 나가기로 했다. 베스트바이에도 가야할 일이 있어서 걸어가기로 했다. 왕복 2시간 거리인데, 샌프란시스코에서도 그렇게 걸어다닌 것을 못 걸어갈쏘냐. 옷을 입고 환불할 노트북가방을 들고 나왔다. 간식도 챙기고. 혹시나 해서 뜯기만 한 건전지도 챙겼다. 날이 너무 좋아서 나가자마자 가디건을 벗어버리고 반팔에 반바지 차림으로 걸었다. 날이 정말 좋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나오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했다. 계속 생각나는 한국의 날씨. 영하 19도. 이곳도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한국의 맹추위를 피해 따듯한 곳으로 왔다는 생각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분이 좋아서 씩씩하게 걸어갔다. 베스트바이를 향해. 가는 길에 공원도 통과하면서 사진도 찍고 여유도 부리면서.

 

  공원을 지나서는 차를 타고만 가는 길이 나왔다. 걸어다니는 여행이 이래서 좋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스치고만 지나갔던 풍경들을 여유롭게 감상하면서 걷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한국에서 이렇게 넓은 평야 지대를 볼 수나 있을까? 나주평야 정도나 가야 산이 없는 이런 곳을 볼 수 있을까 말까 할텐데, 산이 없이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미국땅을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막혔던 마음까지 뻥 뚤리는 기분이다. 이런 것을 보면 좁은 한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바글바글 몰려 살면서 아둥바둥 하는 것 보다는 넓은 땅에서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한적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에 보름 지내면서, 여건이 허락된다면 여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한참을 걸어가고 몸이 지쳐갈 때쯤 베스트바이에 도착했다. 환불코너로 가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 저번에 디카 배터리를 샀다가 환불한 이력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여자친구 여권을 내밀기로 했다. 일단 노트북 가방을 환불한다고 내밀고 가방 속에서 주섬주섬 개봉해서 너저분한 AA 건전지를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것도 환불이 되냐고 물어봤는데, 이 직원, 쿨하다.

 

"Sure."

 

오. 설마. 내가 뜯기만 하고 안쓴거라고 강조했는데 잠시 배터리를 들고 안에 들어갔다 바로 나오더니 군말없이 노트북가방과 뜯은 건전지를 환불해준다. 오예. 기분완전 최고였다. 한국에서도 되려나? 뜯은 건전지 환불. 진상고객이 될 것이라는 예상 외에 오히려 당연히 환불을 해줘야 한다는 듯한 직원의 대답이 너무 마음을 녹게 만들었다. 베스트바이, 정말 짱이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이제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속도는 늦어졌다. 중간쯤 가서는 신호가 바뀔 동안에 주저앉아버렸다. 길거리에 걸어다니는 사람은 딱 1명 만났다. 이렇게 넓은 땅에, 이러니 차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갈 때는 재미있었는데 이 재미는 한 번 정도로 족한 것 같다. 주변 공원 산책 정도나 걸어갈 만하지 차로 5분, 10분 떨어져 있는 마트는 꼭 차를 타야한다는 교훈을 얻으면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공원에서는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보기 좋았다. 나도 나중에 아들이 있다면 같이 운동을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바로 옆이 습지보호구역이라 그런지 새도 많고 공원에 청설모도 뛰어다녔다. 우리나라도 공원은 많지만 아파트단지 속에, 도심 속에 있는 작은 인위적인 공원이라서 이런 동물들은 없는데. 동물도 살기 좋은 곳이 미국인 것 같다.

 

  공원을 걸어오면서는 서로의 꿈에 대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깊이 대화하며 걸었다.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렇게 여유롭게 공원을 산책하면 생각도 깊어지고 대화도 자연스레 트는 것 같다. 나는, 참, 이곳에서 여유를 즐기면서도 하나의 '모험'을 하고 있는 셈이라서 그런지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 앞으로의 직장과 진로 등등을 생각하기 막막함이 앞섰다. 현실을 생각하면 참 무기력해지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상만 쫓으면서 살 수는 없을 것 같은 것이 세상인 것 같은데. 과연 나는 이상과 현실을 몇 대 몇으로 두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이상만 쫓으면 현실은 뒤따라오게 되는 것은 없을까.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공원을 걸었다. 골치는 아파도 살아가기 위해서 깊이 생각하며 고민해 보아야 할 것들인데, 그래도 이런 시간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고민하게 되니까 좋은 것 같다.

  

  집에 와서는 쉬면서 오전에 했던 일들을 계속 했다. 저녁시간이 되어서는 반찬도 하고 저녁을 먹고. 나중에 알보고니 우리가 집에 없는 시간에 전화가 안와서 집에 데리러 오셨다고 했다. 죄송한 마음이 한켠에 생겨났다. 그런데 만회할 기회를 주신건지 저녁에 물건을 받으러 택배를 찾아와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다같이 차를 타고 택배회사로 갔다. UPS. 까만 배경에 방패 안에 글자가 새겨진 로고를 가진 택배 회사인데 그동안 이 차를 봤을 때는 엄청 멋지게 생겨서 현금수송차량인줄 알았는데 단순한 택배회사차량 이었다니. 택배회사에서는 약간의 문제가 생겼는데 우리의 물건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는 것. 깜박하고 우리가 송장번호를 안갖고 왔는데 이것을 알아야만 물건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서 알겠다고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서는 처음으로 토익 영어가 정말 쓸모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대화하는 내용들이나 단어 사용들이 다 토익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마치 토익 듣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 토익, 열심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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