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9일 토요일
어제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피곤했는지 아침에도 늦게 일어나고 집도 늦게 나갔다. 6시 알람 듣고 '아침 운동 가야지'라고 생각하고 눈을 떴는데 7시 30분. 가끔 이럴 때도 있어 줘야 피곤이 풀리는 법이지.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다. 일단 미국 와서 어제 '샌프란시스코'라는 큰 모험(?)을 했기 때문에 일주일 넘게 갖고 있었던 '미국 와서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하는 불안감은 우선 가셨다.
오늘은 오전에는 차를 빌려서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오후에는 가게 일을 도와드리기로 했다. 사실 이곳저곳이라고 썼지만 별다른 곳은 없다. 새크라멘토가 은근히 볼거리가 있지만, 또 은근히 볼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마트관광'도 즐거워하고 있으니 일단 베스트 바이(Best Buy)로 갔다. 엊그제 따라가 본 전자기기 파는 곳. 어제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진을 250장 정도 찍으니 배터리가 다 되었는데 아직 초저녁. 이렇게 되면 나중에 LA랑 라스베가스는 아침부터 돌아다닐 건데 배터리가 없어서 사진을 못찍는 사태가 올 수 있으니 한 개 사기로 했다. 어제 아마존에서 엄청 알아봤는데 무슨 배터리가 2달러 하는 것들도 있었다. 한국에서도 정품은 5만원이 넘어가고 중고로 사도 2-3만원이었는데. 믿을 수 없어서 그냥 베스트 바이에 가기로 했다. 직원에게 배터리 코너를 물어보고 원하는 모델을 찾으니 소니 정품도 있고 호환이 되는 10달러 싼 배터리도 알려주며 추천을 해줬다. 소니 정품은 49달러, 호환 배터리는 39달러. 여기에 세금이 붙으면 한국이랑 비슷한 가격이구나, 너무 비싸다. 그런데 바로 옆에 개봉상품을 재포장해서 정품을 39달러에 파는 것을 발견했다. 와우. 바로 사서 계산하고 나왔다. 밖에서 바로 열어서 껴봤는데 배터리가 호환이 안된다고 메시지가 뜨면서 꺼졌다. 왜이럴까 다시 살펴보니 모델번호 끝자리가 한 개 달랐다. 아, 다시 들어가서 환불을 했다. 회원카드를 보여달라고 했는데 없다고 하니까 여권을 보여달란다. 여권을 보여주고 영수증을 주니 개봉을 했어도 쉽게 환불이 되었다. 이건 영원한 개봉상품이구나... 그냥 39달러짜리 정품은 아닌 호환배터리를 보니 내 디카 모델명도 뒤에 적혀있고 잘 될 것 같아서 다시 샀다. 가격은 똑같으니 환불 받은 금액을 그대로 주머니에서 1센트 하나 안틀리고 꺼내서 그대로 내니 직원이 피식 웃는다.
카메라에 껴보니 아주 잘된다. 2년 넘게 쓴 디카에 새 배터리를 사줬으니 앞으로 다시 2년은 넘게 써야겠다. 베스트바이에서 카메라들을 보면서 너무 싼 것 같아서 새 카메라를 사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밖에 나와서 함께 모여있는 옆 마트로 갔다. 본격적인 마트투어 시작. 옆 가게는 주방용품을 파는 가게였다. 갑자기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미국은 코렐이 엄청 싸다고 하더라."
무겁게 어떻게 들고올까 하는 마음과 내가 생각했을 때 '별거'를 다 사오시라고 하신다는 생각에 됐다고 했지만 한 번 물어봤다. 직원에게 "코렐"이 어디있냐고 해서 물어보니까 잘 못알아 듣는다. 아, 뭐라고 말해야 하나. "코렐, dish, bowl"이라고 말하니까 흑인 여자 직원은 이제야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Oh~! Dishes, 코뤠-엘?"이라고 말했다. 아, 코렐은 마치 김준현이 개그콘서트에서 말하는 "고뤠애?"라고 말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으 안내를 받아 가보니 80달러가 조금 안되는 16개짜리 세트 한 개만 있었다. 내가 그릇 가격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어머니랑 한 번 인터넷에서 찾아봤을 때 한국은 상당히, 몇 십만원 정도 할 정도로 비쌌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여튼, 일단 메모 해 놓고 좀 더 구경을 하다가 나왔다. 옆 가게는 옷가게. Old Navy, 늙은 해군(?)이라는 잘 모르는 메이커였다. 신기한 것은 옷이나 신발들을 사람들이 보면 안걸어놓고 다 바닥에 흘려놨다. 올드 새크라멘토에서 갔었던 메이시스 백화점에서도 이런 모습들을 보았는데, 정리는 직원이 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있어서 그런건가?
마트 구경을 하고 나서는 스타벅스로 갔다. 미국에 스타벅스는 정말 많다. 카페베네보다 더 많다. 길건너 마주보고 있는 곳도 있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가 미국의 상징이라고 하는 말이 정말 과언이 아니다. 처음으로 가보는 스타벅스. 2013년 첫 스타벅스는 미국이다. 아쉬운 점은 시애틀에 있는 스타벅스 1호점을 가려고 했으나, 여행경비 때문에 과감히 포기했다. 새크라멘토에서 암트랙 기차를 타면 왔다 갔다는 하루, 하루 찍 잡아야 하고, 하루가 정말 20시간이 넘는 하루, 또 도착하면 밤이기 때문에 아무 구경도 못하고 호텔 1박이 필수, 그렇다고 비행기를 타면 기차의 두 배 정도의 가격이니, 제한된 경비로 시애틀을 가기에는 무리였다. 이거 때문에 미국에 온지 일주일이 넘도로 그토록 스타벅스를 안갔던 것인데, 이제 시애틀은 접었으니 부담없이, 그러나 스타벅스 1호점에겐 약간 미안함 마음을 가지고 스타벅스로 갔다.
작은 매장에 사람들은 줄지어들어온다. 줄도 계속 선다. 직원도 쉴새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흑인 꼬마애들이 가게를 들락날락하며 시끄럽게 하자 흑인 직원이 내보냈다. 우리는 메뉴판을 한참동안 구경하며 무엇을 마실까 고민을 했다. 가격은 한국보다 더 저렴한 편이었다. 된장녀의 아이콘이 된 스타벅스가 사실 한국에서 오히려 다른 카페보다 꼭 비싼건 아니지만 미국은 된장녀의 아이콘이라 부르기에는 가격들이 저렴했다. 아메리카노가 1.95달러. 한국은 얼마지?
나는 오렌지 망고 스무디를, 여자친구는 화이트 초코 모카를 마시기로 했다. 주문은 여자친구를 시켰다. 아직 영어 울렁증이 있는 여자친구. 한참을 고민하더니 잘 주문을 하고 온 듯 했다. 조금 기다렸다가 우리가 시킨 음료가 나온 것 같아서 받아왔다. 그런데 아까도 영수증을 안 받았는데 지금도 안 받았다. 미국 와서 쓴 돈을 관리하면서 영수증을 모으고 있었는데 스타벅스에 영수증을 못받다니. 찝찝해서 내가 가서 영수증을 받아왔다. 이것도 사람들 줄 안 섰을 때 얼른 가서 말했다. 대강 뭐, 조금 전에 이거, 이거 주문 했는데 영수증 못받았다, 영수증 줄 수 있느냐, 이러니까 알겠다고 하면서 자기 할 일 끝나고 준다고 1분만 기다리라고 해서 우리가 주문했던 내역을 찾아서 뽑아줬다. 별 것 아닌 일에 기분이 좋아졌다. 마치 엄청난 임무를 수행한 것 처럼. 스타벅스에서는 메가버스를 예약했다. 어제 한 번의 샌프란시스코로 끝낼 수 없으니 가격이 싼 날을 찾아서 3번을 더 예약했다. 아직 못가본 금문교 한 번, 그리고 UC버클리, 스탠포드 각각 한 번씩 총 세번. 이렇게 구경하면 샌프란시스코는 어느 정도 만족할 것 같았다.
여행계획 세우고 일정을 확정짓는 임무를 하고 나서는 가게로 가서 가게 일을 도와드렸다. 카운터를 봤는데 그동안 정말 하고 싶었던 일 중에 하나였다. 대학교 다닐 때 항상 과외만 해서 다른 아르바이트의 경험이 없어서 졸업할 때 쯤 되서 아쉬웠는데 미국에 와서 카운터를 보게 되다니. 손님이 오면 친절히 헬로우 해 주고 갈 때는 땡큐 해 주면 되는 일이었지만 재미있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여자 손님이 블라우스를 보는데 내가 좀 몇 마디 해서 웃었는데 마음에 든다고 해서 산 것이다. 고르고 있을 때 단지 나는 "Very Nice"라고 하면서 입어보라고, 입는 것은 공짜라고 했을 뿐인데. 뿌듯했다.
미국에 살기 위해서 온 사람들은 공항에 누가 픽업을 하러 오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직업이 결정된다고 한다. 지금 가게 주인님도 십 수년 전에 미국에 오셨을 때 옷장사를 하시는 분이 픽업을 오셔서 항상 보는 것이 옷장사 뿐이 없어서 지금까지 옷가게를 하게 되었다고.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대부분 이런 법칙(?)이 맞아 떨어진다고 한다. 옷가게, 처음 카운터를 보면서 일일 옷장사를 해봤는데 재미있다. 미국와서 옷장사를 해볼까?
경험을 해 본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다. 이건 일일 캐셔를 해 보고 든 생각이다. 어떤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어떨 것이다, 어떨 것이다 하고 아는 것과 내가 직접 그 경험을 해 본 것과는 정말 천지차이이니 말이다. 캐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수도없이 많이 봐 왔는데 내가 고작 몇 시간 해 보니 그동안 내가 알고있던 모든 것은 날아가버리고 나의 작은 경험이 머릿속 한 자리를 차지했다. 정말 미국에서 옷장사를 해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가 1%정도 생겼다고 하면 괜찮을 것 같고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해 보았다. 그동안 내가 해 왔던 일들과 경험했던 일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생각해 보니 어느 정도 정리되는 것 같았다. 남들이 추천하는 일들과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 달라서 고민했던 것들, 남들이 잘한다고는 하지만 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들 때문에 머리 싸매면서 고민했던 것들을 정리해 보면서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래서 일단 작은 결론을 내린 것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나에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았지만 항상 만나는 학생들이 좋았던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무료 공부방도 몇 년 동안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선생님도 꿈꿨던 것이고. 사람을 만나는 일, 이것이 나에게 맞는 것 같다. 아, 결국 옷장사가 딱인가?
집에 와서는 우리의 여행 일정에 대한 종합토론이 벌어졌다. 샌프란시스코를 싼 가격에 메가버스로 왔다갔다 하는 것은 좋은데, 라스베가스를 갈 때도 메가버스를 오랜 시간 타면서 여행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고, 어쩔 수 없이 LA호텔에서 잠만 자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가격이면 라스베가스에서 새크라멘토까지 비행기를 타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계산해 보니 정말 그랬다. 그래서 비행기로 결제. 결제는 오늘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인지 대신 해 주셨다. 오예.
그런데, 그럼, 원래 타려고 했던 메가버스 표는 어쩌나. 점심에 샌프란시스코 세 번 왕복 하는 표로 바꿀 수 있었는데 이미 샌프란시스코 표는 지불 한 상황. 표가 남는다. 새크라멘토에서 출발하는 리노 버스를 알아보니 오전에 출발해서 리노에서는 오후에 출발하는 차가 있다. 3시간 정도 구경 할 수 있으려나? 이러면 안 가는게 낫지. 어떡하나. 이 표는... 다시 샌프란시스코를 가는 표로 바꿔야 하나. 일정에 계획을 맞추자는 것 때문에 생긴 예상치도 못한 작은 사태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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