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야기/독후감V

코스모스 독후감 '광활한 우주를 체험하다'

inhovation 2023. 1. 21. 16:16

No. 192

코스모스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번역

사이언스북스 펴냄

 

과학계에서는 매우 유명한 책, "코스모스"는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두 번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두 번 모두 나는 "코스모스"를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고, 이번에 우연한 기회로 "코스모스"를 찾아 읽었다. 이번 세 번째 만남은 내가 손을 내민 것이고,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요즘 전자책으로 독서를 꾸준히 하면서 어떤 책을 읽을까 고르다가 우연히 눈에 보이게 되었고, 이번엔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나는 학부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대학교를 다닐 때, 이 책이 번역되고 나서 학교에서는 선배들과 전공에 훨씬 심취한 동기들이 이 책에 대한 극찬을 했던 기억이 있다. 대략 그냥 우주론에 대한 책이고, 신앙이 더욱 성장하며 무르익어가고 있던 때였어서 그랬는지, '창조론'과는 대비되는 '빅뱅이론'을 담은, 그 때 내 기준에서의 신앙적인 불온서적인 "코스모스"를 읽을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내 신앙이 흔들리거나 어쩌면 신앙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깔려 있었다. 게다가 나는 앞서 언급한 내 동기들처럼 물리학에 심취해있지는 않아서 특별히 지적으로도 끌리지 않았다. 이것이 나에게 찾아온 첫 번째 "코스모스"이고 피했던 이야기이다.

 

두 번째는 대략 한 10년 뒤 즈음인 것 같다. 교회에서 청년부 찬양팀을 새로 들어갔는데, 기타 치는 형이 나의 전공이 물리학이라는 것에 대해 매우 흥미를 보였다. 이유는, 그 형은 기타가 전공이었지만 신앙에 대해서는 약간은 의구심도 있고 확신은 없는, 그리고 그 형이 읽었던 "코스모스"가 교회에서의 가르침이나 성경과 많이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매우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물리학을 전공했으면 "코스모스"를 읽어보았는지, 또 물리학에서 빅뱅이론을 배웠을텐데 신앙적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등등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이 때의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럽게도) 그런 궁금증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답 뿐만 아니라 고민의 과정조차도 이야기 할 게 전혀 없었다. 몇 달 후, 그 기타치는 형은 교회를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고, 나오지 않게 된 이유가 내가 그런 고민에 대해서 답을 해주지 못해서 그런 것 때문은 아닐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도 뭔가 괜히 이렇게 생각나고 그러는 것이, 좀 그렇다. 잊을 수 없는 그런 일 정도로 남아 있다.

 

2022년 말, "코스모스"를 읽는 동안 나는 특별히 내 신앙이 흔들린다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내 신앙이 많이 성숙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꼭 이런 이유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이 기독교 신앙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반 기독교적으로 서술되어 있지도 않다. 이 책은 그냥 코스모스, 그 광활한 우주에 대해서 아주 순수하게 과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물리학 전공이기도 해서 이해하기에 엄청나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비전공자가 이 책을 본다면 다소 어렵게 느낄 법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 못 읽을 것은 아니다. 전문적인 내용도 나오지만, 우리가 아는 행성과 지구, 우주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우주 안에 살고 있지 않은가?

 

연말에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힘든 일도 많이 있어서 그랬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일단 뭔가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이 광활한 우주와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이 공간과 이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에 대해서 되새겨 보았다. 내 삶은 의미가 전혀 없는 것 처럼 체념하게 되는 사고의 흐름이 아니라, 이런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까지 힘들어 하면서 고민하고 진짜 죽을둥 말둥 하면서 지낼 필요까진 없지 않나 하는 생각. 그래서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기도 하고 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는 또 이런저런 생각도 깊어지는 것 같아서 나름 또 그냥 좋았다.

만유인력은 거리 역제곱의 법칙이다. 인력의 세기는 두 물체 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두 물체 사이의 거리를 2배로 늘리면 둘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의 세기는 4분의 1로 약해진다. 만약 거리를 10배로 늘리면 인력은 10의 제곱 10^2 = 100, 즉, 100분의 1로 약해진다.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만유인력의 법칙. 책을 읽을 때는, 이게 사람 사이의 관계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멀어지고 만남도 뜸해지면 점점 그 관계도 약해진다는 것. (책을 읽으면서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나보다...)

물체가 떨어지는 일은 태초부터 있었다. 달이 지구 둘레를 돈다는 사실은 까마득한 옛적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이 두 가지 현상이 같은 힘에 따라 일어난다는 엄청난 사실을 최초로 알아낸 사람이 뉴턴이었다.

뉴턴의 사과 이야기. 달이 지구를 도는 것은 전혀 특이한 것은 아니었지만, 뉴턴은 그것을 잘 정리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정립했다. 논문을 만든거지.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하는데, 누구나 아는 것을 잘 정리한 일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논문인 것이고. ... (논문 때문에도 많이 힘들었나보다. reject 3번 당하고...ㅠ)

 

전자책으로 읽어서 두께는 모르지만, 종이책은 꽤 두꺼운 책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내용이 충실하고 전문적이라는 의미이다. 순수하게 우주를 다룬 아주 그 정수에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빅뱅이론이나 우주론에 대한 책도 많이 있겠지만, 진짜 뭔가 '진짜'를 읽고 싶다면 "코스모스"를 추천한다. 그리스도인이 읽어도 (나는) 신앙을 잃지는 않았다. 물론 '그 형'은 코스모스를 읽고 고민은 많았지만... 아래는 책을 읽으면서 밑줄 쳐 놓은 부분이다. 이래저래 가슴을 울렸던 구절도 있고, 그냥 기억하고 싶은 내용들이다. 책이 어떤 느낌인지 참고할 수 있겠다.

 

인류는 지구 바깥으로 나가서 우주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한 점 티끌 위에 살고 있고 그 티끌은 그저 그렇고 그런 별의 주변을 돌며 또 그 별은 보잘 것 없는 어느 은하의 외진 한 귀퉁이에 틀어 박혀 있음을 알게 됐다. 우리의 존재가 무한한 공간 속의 한 점이라면,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찰나의 순간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인위 도태 또는 인위 선택이 어렇게 짧은 기간에 그렇게 두드러진 변화를 초래할 수 있었다면, 수십억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자연에서 진행된 자연 도태 또는 자연 선택이 가져온 변화가 어느 정도의 규모일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생물 세계의 다양성과 아름다움은 전부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진화는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는 외계 은하들을 연구함으로써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상상을 초월한 규모로 벌어지는 격렬한 혼돈의 폭력 역시 우주의 한 속석이다. 우주는 자연과 생명의 어머니인 동시에 은하와 함께 문명을 멸망시키는 파괴자이다. 우주는 반드시 자비롭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적의를 품지도 않는다. 우주 앞에서 우리의 생명, 인생, 문명, 역사는 그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다.
우주 팽창과 대폭발 이론이 전반적으로 옳다고 한다면, 우리는 좀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대폭발의 순간은 어떤 상태였는가? 대폭발 이전의 상황은? 그 당시 우주의 크기는? 어떻게 물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던 우주에서 갑자기 물질이 생겨났는가? 이러한 물음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사람들은 보통 특이점에서 벌어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신의 몫으로 떠넘긴다. 이것은 여러 문화권에 공통된 현상이다. 하지만 신이 무에서 우주를 창조했다는 답은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근원을 묻는 이 질문에 정면으로 대결하려면 당연히 "그렇다면 그 창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을 해결해야 한다. 만일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식의 결론밖에 내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우주의 기원 문제에는 답이 없다 하고 한 단계 단축하는 것이 어떨까? 또 한편으로는, 신은 항시 존재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역시 한 단계 줄여, 우주가 항시 존재했다고 하면 어떻겠는가? 어느 문화권이든 창조 이전의 세상과 세계 창조에 관한 신화를 갖고 있다. 세상의 "신들의 짝짓기에서 만들어졌다."라거나, "우주의 알에서 태어났다."라는 식의 소박한 우주관을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만나게 된다. 이러한 신화들은 우주가 사람이나 동물이 하는 바를 따라했다는 순진한 상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는 세계 각지의 다섯 개 신화에서 각각 발췌한 내용을 소개하겠다. 완성도 면에서 수준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태평양 해양 문화권에서부터 시작해보자.
150억 년의 긴 세월을 거쳐 결국 물질은 의식을 갖추게 됐다. 그러나 의식의 산물인 지능은 인간에게 무서운 능력을 부여했다. 인간이 자기 파멸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갖춘 현명한 존재라고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이러한 파국을 피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다. 우주적 시간 척도에서 볼 때 지극히 짧은 시간이겠지만 우리는 어서 지구를 모든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하나의 공동체로 바꿔야 한다. 그리하여 지구상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한편, 외계 문명과의 교신을 이룩함으로써 지구 문명도 은하 문명권의 어엿한 구성원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우주에 이야기할 상대가 있을까? 우리는 은하수 은하에만 물경 3000억 내지 5000억 개의 별들이 있다고 하는데, 지적 생물이 거주할 수 있는 행성을 거느린 별이 어찌 태양 하나뿐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기술 문명의 출현 역시 은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 은하는 기술 문명의 열기로 가득 찬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 문명권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태양 가까이에 있는 어느 별 주위를 고도 기술 문명의 행성이 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행성의 지적 생물들이 안테나를 펼쳐 놓고 우리의 신호가 오기를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눈을 들어 밤하늘에 떠 있는 흐릿한 빛의 무수한 점들을 바라볼 때, 그중 어떤 별의 주위를 도는 행성에서는 우리와 생김새가 판이한 그 누군가가 우리가 태양이라고 부르는 별을 한가롭게 내려다보면서, 그 나름의 터무니없는 상상의 나래를 한없이 펼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다. 기술 문명의 진화 과정에는 심각한 장애 요인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은하의 행성 분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드물지도 모른다. 생명의 출현이라는 것도 우리가 실험을 통해서 추측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현상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등 생물에서 고등 생물로의 진화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면 복잡한 형태의 고등 생물로 쉽게 진화할 수는 있어도, 이들의 사회가 고도의 과학 기술 문명을 향유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달하려면 참으로 기적에 가까운 우연의 일치들이 착착 순서에 맞춰 이루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환경의 악화가 나무 위에서의 생활을 즐기던 영장류들로 하여금 깊이 고민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지적 능력은 이 고민을 통하여 크게 발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점이 묘한 우연들의 연속을 언급하게 된 배경일 것이다. - 옮긴이)
이 방법은 코델 대학교의 프랭크 드레이크 교수가 창안한 것이다. 드레이크 방정식의 가치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논의될 수 있겠지만, 한 가지 꼭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방정식이 항성천문학, 행성과학, 유기화학, 진화생물학, 역사학, 정치학, 이상심리학 등 참으로 다양한 분야의 학문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코스모스의 상당 부분이 이 하나의 방정식에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 값을 그대로 사용하여 곱셈을 계속하면, N* x fp x ne x fl x fi x fc x fL ~ 1x101 이라는 결과를 얻게 된다. 어느 특정 시점에서 볼 때, 고도의 기술을 자랑하는 문명권이 우리 은하에 겨우 열 개 정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 문명들 중에서 약 1퍼센트만이라도 기술 문명의 불안정한 사춘기를 잘 통과한다면 그래서 이 중대차한 역사의 분기점에서 올바른 선택만 할 수 있게 된다면, fL=1/100이므로 N=107의 결과를 얻게 된다. 즉 우리 은하수 은하에 존재하는 문명사회의 수효가 적어도 수백만 개에 이른다는 추산이다. 드레이크 방정식의 주로 앞부분에 오는 인자들, 즉 천문학, 유기화학, 진화생물학 등과 관련된 인자들의 추정값에도 불확실한 점이 물론 많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정치와 경제, 그리고 지구의 경우, 인간 본성에 관한 인자들이야말로 이 방정식에서 가장 불확실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은하 문명권의 거의 대부분이 자기 파멸의 길을 걷지 않는다면 부드럽고 달콤한 별들의 메시지가 온 하늘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들이 영원불멸의 수준에 거의 도달한 존재라면 그들은 성간 탐색을 겨우 아이들 장난쯤으로 간주하고 있을지 모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외계인이 지구를 아직 방문하지 않은 이유를 알 듯 하다. 광막한 공간에 너무 많은 별들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지구까지 도착하기 전에 성간 탐험을 통해 성취하려던 그들의 목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그 시간 동안에 이미 그들은 우리가 검출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해 버렸을 수도 있다.
핵을 보유한 초강대국들이 떠들어대는 그들의 뻔한 주장을 우리는 귀가 아프게 들어 왔다. 나라마다 자기 나라를 위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인류 전체를 위하여 외쳐댈 사람은 지구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과연 누가 우리 지구의 편이란 말인가?
인간 행위에 대한 오늘날의 이해는 피부 접촉의 많고 적음이 어떻게 폭력성의 발현과 그런 상관관계를 갖게 됐는지 아직 속 시원하게 설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그렇지만 추측은 가능하다. 프레스콧의 연구 결과는 둘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존재함을 증언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유아기에 피부 접촉이 빈번하고 결혼 전에 성관계가 인정되는 사회가 폭력 성형의 사회가 될 상대 빈도는 2퍼센트이다. 이러한 빈도의 발생이 우연의 소산일 확률은 1:125,000이다. 나는 아직 이와 같이 정확한 예측을 가능케 하는 표현 변수를 본 적이 없다." 사람은 어렸을 때에는 피부 접촉에 목말라 하고 다 자라서는 성적 접촉을 갈망하게 마련인 모양이다. 프레스콧의 연구 결과가 옳다면 핵무기와 피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어린이 학대, 성생활은 심한 억압 등은 인류의 평화를 해치는 죄악이다. 인류의 미래에 공헌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의 아이를 자주 껴안아 주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세워질 당시에 살았던 테오프라스토스는 "미신은 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비겁함"이라고 지적했다. 그의 지적에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똑바로 둘러볼 필요가 있다. 이 우주에서는 각종 원자들이 별들의 중심에서 합성되고, 매 초마다 태양과 같은 별들이 수천 여 개씩 태어나며, 여기저기 막 태어난 행성들에서는 중심별에서 방출된 빛과 하늘을 가르는 번개가 물과 대기에 새로운 생명의 불꽃을 댕기고, 수천억 개에 이르는 은하들 하나하나에서는 생명의 진화를 가능케 하는 원료 물질들이 별의 폭발과 함께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퀘이사가 있고 쿼크가 있으며 눈송이와 개똥벌레가 함께 살아 숨쉬는 코스모스인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우주에는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블랙홀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아직 모르는 세상, 지구와 다른 문명 세계가 수없이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외계 문명권들에서 발사된 전파 신호가 지구를 두드리고 있을지 모른다. 우주의 실제와 비교해서 볼 때 미신과 사이비 과학이 주장하는 바는 참으로 허망하다. 과학이 인류의 고유 문화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고 과학이 밝힌 바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정녕 중요한 우리의 과업인 것이다.
과학은 단지 도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도구이다. 과학에는 고유한 특성이 있다.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교정할 줄 안다는 것이 하나의 특성이다. 또한 모든 분야에 적용이 가능하다는 또 다른 특성이 있다. 그리고 과학하기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단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성불가침의 절대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가정이란 가정은 모조리 철저하게 검증돼야 한다. 과학에서 권위에 근거한 주장은 설 자리가 없다. 두 번째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은 무조건 버리거나 일치하도록 수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있는 그대로 이해돼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코스모스를 우리가 원하는 코스모스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하다고 생각됐던 것이 거짓으로 판명될 때도 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제한된 상황에서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 있다. 하지만 각국에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더 넓고 큰 맥락에서는 목적을 공유할 수 있다.
사람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하는 사람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와 조금이라도 다른 성격의 사회를 믿을 수 없는 기괴한 존재로 간주하며 심히 혐오하고는 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심을 갖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핵폭탄에 대한 이야기가 심각하게 다루어진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결국 '핵'을 다룰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였는데, 지금의 이 상황에서 핵전쟁이 시작되면 지구는 겉잡을 수 없는 파멸과 재기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에, 절대 핵전쟁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을 읽을 때에는 저자 '칼 세이건'이 우주에 대해서 알려주고 싶은 게 아니라, 핵전쟁을 막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인가 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어쨌거나 대단한 책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어떤 책들은 다 읽고 나면 '겉핥기'에 불과했다거나 좀 그 물탄듯한 느낌이 드는 책도 있는데, "코스모스"는 진짜 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원액과 같은 진한 느낌이었다. 시간 내서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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