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하다. 어둡고 침침하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공간이다. 사방이 대리석이다. 그 가운데 유리관이 하나 놓여있다. 그리고 그 안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남자가 누워있다. 호찌민이다. 죽은 지 40년이 지났지만 방부 처리되어 조용히 잠을 자는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다.
숨소리도 나지 않는다. 유리관 주변에 서 있는 군인들, 그리고 ㄷ자 통로에 서 있는 군인들은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는다. 호찌민을 둘러싸고 정면만 응시하고 있다. 베트남의 영웅, 호찌민을 이렇게 바로 옆에서 지키는 군인들, 그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다.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호찌민을 보러 온 사람들은 모두 눈을 떼지 못한다. 천천히 걸어갈 뿐이다. 멈춰서는 안 된다. 큰 소리도 내면 안 된다. 발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히 한 발씩 내딛을 뿐이다. 하노이를 돌아다니며 수 없이 많이 봐 온 호찌민의 모습인데 실제 호찌민을 이렇게 내 눈 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신기하면서도 오싹하다.
새벽 1시가 조금 지났을까?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버스가 멈춰 섰다. 사실 난 모르고 자고 있었는데 아내가 날 깨웠다. 일어나서 보니 베트남 사람을 중간에 내려주는 것이었다. 다 온 게 아니니까 다시 자자고 했다. 그리고 아내는 잠이 들었는데, 나는 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 ... 지도를 보니 아직 가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창밖을 보면서 그냥 계속 갔다. 잠은 오지 않았다. 차 한 대 없는 고속도로였지만 버스는 절대 과속을 하지 않았다. 중간에 다른 베트남 승객을 내려주기도 하고 다시 출발했다. 지도를 보면서 가고 있는데 길을 돌아가기도 했다. 왜 그럴까... 공항을 지나 시내 쪽으로 향해 롱비엔에는 새벽 4시가 다 되어서 도착했다. 기사는 사람들을 깨우며 내리라고 했다. 우리는 잠을 안 자고 있던 내가 제일 먼저 내렸다. 택시 기사들이 많이 달라붙었지만 호안끼엠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면 되므로 그냥 무시했다.
택시기사를 피해 가방을 다시 정리하고 호텔로 향했다. 차도, 오토바이도 다니지 않는 베트남 길은 정말 적막했다. 가게들도 다 문을 닫았다. 중간에 어떤 곳은 문을 열어서 봤더니 마사지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정말 마사지를 하는 곳 같지는 않았다. 아내가 같이 버스를 타고 온, 어제 저녁을 같이 먹은 여자분은 혼자인데 같이 가는 게 어떠냐고 해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버스로 가니 아직 승객들이 내리고 있었고 한국분도 있어서 같이 가자고 했다. 이분은 오늘 저녁에 공항으로 가셔야 한다. 호텔은 잡지 않았다고 해서 일단 우리 호텔까지는 어떻게라도 같이 가 보기로 했다.
오는 길에는 새벽 과일 시장도 봤다. 소매는 아닌 것 같았고 완전 대량으로 하는 도매시장 같은 느낌. 바나나를 엄청 깔아놓고 팔고 있었다. 침침한 길을 더 걸어 우리 호텔로 왔는데 오면서 다른 호텔들이 다 문을 닫고 있어서 설마 했는데 역시 우리 호텔도 문이 잠겨 있었다. 안에 불이 켜 있긴 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를 어쩐담... 일단 KFC라도 가 있기로 하고 호안끼엠 호수 쪽으로 더 나갔다.
그런데 KFC도 문을 닫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문 연 곳이 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머리를 짜내서 호안끼엠 위쪽에 큰 호텔으로 가 보기로 했다. 혹시 문을 열었으면 여기는 로비에서 조금 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분은 캐리어를 끌고,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큰 호텔에 도착했는데 이곳 역시 문을 닫고 있었다. 안에 사람은 있었지만 투숙객도 아니니 부르기가 좀 뭐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앞에 서 있으니까 직원이 나와서 뭐하고 있냐고 물어봤다. 우린 그냥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니 다시 들어갔다. ... 여기서도 좀 서 있다가 그래도 탁 트인 곳으로 가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다시 호안끼엠으로 갔다.
새벽엔 비가 왔는지 아니면 안개가 너무 짙고 이슬이 내렸는지 의자가 다 젖어서 앉을 수가 없었다. 호수 주변에서도 그냥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우리처럼 방황하는 다른 여행자들도 볼 수 있었고 어떤 서양 사람은 젖은 의자에 쿨하게 그냥 앉아서 노트를 적기도 했다.
해 뜨기 전 새벽 호안끼엠의 모습은 새롭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일찍부터 운동을 하는 아저씨, 아주머니들을 볼 수 있었다. 차와 오토바이는 거의 다니지 않았고 하노이에서 제일 시끄러운 이 곳 중 하나인 호안끼엠 로타리가 이렇게 조용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영부영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는데 24시간 카페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고 해서 가기로 했다. 15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였지만 그래도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이니 모두 그곳으로 향했다. 지도를 중간에 3-4차례 더 확인하고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니 식당 주인들이 우리를 부른다. 24시간 카페라고 해서 정말 깔끔한 카페를 기대했는데 그냥 24시간 길거리 음식점이었다.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더 안쪽으로 그냥 들어갔는데 진짜 카페가 나타났다. 깔끔한 인테리어의 카페. 내부로 들어가니 사람이 몇 명 있었고 어떤 서양 여자는 심지어 안쪽 소파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음료를 한 개씩 시켰다. 사실 커피, 주스를 마시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큰 고민은 하지 않고 대충 시켰다. 화장실도 다녀오고 여기서 편하게 앉아서 좀 쉬었다. 이분은 목포가 고향이고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시는 분인데 휴가를 내고 베트남에 왔다고 했다. 그런데 설에는 고향에 가지 않고 출근을 하신다고...
이래저래 쉬는데 너무 졸리기도 했고 서양 여자가 일어나서 나가서 내가 그 자리에 가서 누웠다. 완전 편했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카페 직원은 흔한 일인지 전혀 제지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잠이 안 올 것 같았는데 아내가 깨워서 일어나보니 어느새 해도 뜨고 날도 밝아 있었다. 8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5시 조금 넘어서 들어왔는데... 많이도 잤네.
자리를 정리하고 다 같이 나왔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시 우리는 호안끼엠으로 향했다. 같이 온 분은 다른 호텔을 찾아 가신다고 중간에 헤어졌고 우리는 머물었던 호텔로 갔다. 가는 길에는 소이를 파는 아주머니가 보여서 두 개를 사먹었다. 역시 아침밥 대용으로는 소이가 짱이다. 호텔에 도착하니 문이 열려 있어서 로비에 있는 친구에게 사정 설명을 했다. 그러니 문을 두드렸으면 자기가 열어줄 수 있었다고 했다. 뭐, 그냥 너 깨우기 싫어서 그랬다고 하고 우리 방으로 들어갔다. 아, 별로 좋은 방은 아니어도 그래도 침대가 편하긴 하구나.
조금 더 쉬고도 싶었으나 호찌민 묘를 가기 위해 짐만 정리하고 다시 나왔다. 사파투어까지 잘 끝낸 기념으로 여행사에 가서 오랜만에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여자직원밖에 없었다. 남자직원을 물어보니 설이라 고향에 가서 오지 않는다고 했다. 아...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인사는 다음 여행 때 하기로 했다. 온 김에 호찌민 묘에 대해 물어보니 열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택시비로는 4만동 정도라고.
입장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우리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안타려고 걸어다닐 땐 많이 보던 택시였는데 또 이렇게 막상 타려고 하니 잘 안 잡힌다. 다른 사람이 먼저 잡거나 큰 택시뿐이다. 작은 택시가 저렴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우리는 조금 더 걸으며 작은 택시를 찾았다. 그러다 마티즈 택시를 발견하고 냉큼 잡아서 호치민 묘로 가자고 했다. 미터기 켜는 것을 확인하고 나도 구글 지도를 켰다. 그런데 잘 가는 것 같더니 살짝 옆으로 빠진다. 왜지? 그러다 사거리에 멈춰서 오른쪽으로 가야 해서 내가 오른쪽으로 갈거냐 했더니 그럴거라고 한다. 음... 엄청 돌아온 것은 아닌데 굳이 왜 이쪽으로 왔을까...
3만 4천동이 나왔지만 3만 5천동을 받고 5천동만 거슬러 받았다. 택시는 호찌민 묘 끝에서 우리를 내려줬고 여기서부터는 무조건 걸어가야 했다. 다행히 호찌민 묘로 들어가는 관광객들이 보였다. 항상 아침 이 시간대에는 와 본 적이 없어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길을 따라 조금 걸어가니 검색대가 나왔고 여기서 물을 버리라고 해서 마시지도 못한 물을 버렸다. 그리고 가방 검사. 카메라는 저 쪽에 있는 보관소에 맡기라고 했다. 보관소에 카메라를 맡기고 번호를 받았다. 그리고 호찌민 묘 한쪽에 멈춰 서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10명 정도씩 끊어서 입장을 시키고 있었다.
군인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호찌민 묘 가까이 갔다. 하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가까이 올 때마다 뭔가 긴장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항상 멀리서만 바라보던 호찌민 묘 건물에 이렇게 가까이 와 본 다는 것도 신기했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기분도 상당히 흥분되었다. 레드카펫을 밟고 대리석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핸드폰은 제출하지 않았지만 여기서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그랬다가는 어떻게 될 지도 모르니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좌우 통로가 있었다. 우리는 모두 왼쪽으로 가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틀어져서 문으로 들어가니 호찌민이 있는 공간이 나왔다. 무덤 속, 시신과 함께 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음산한 기운이 들었다. 짧은 통로를 ㄷ자로 지나갈 때는 호찌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눈을 떼지 못했다. 멈춰서 관찰은 할 수 없었고 무조건 걸어가면서 봐야 했다. 짧은 호찌민과의 만남을 끝내고 다시 아까 들어왔던 입구로 나가 건물 오른쪽으로 빠졌다. 기분이 묘했다. 시신을 봤다는 것과 베트남의 아버지 호찌민을 직접 봤다는 기분이 뭔가... 나오면서는 이곳이 왜 무료관람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곳도 다른 관광지처럼 입장료를 받는다면 이것 자체가 호찌민에 대한 모욕일 것 같았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사람, 그런 장소이기에 무료로 개방하는 것 아닐까 싶다. 그 대신 아침 이른 시간부터 오전까지만 시간을 한정함으로써 아무나 쉽게 들어오게는 하지 못하게 하는... 여튼 신기했다. 러시아에는 레닌이, 중국에는 마오쩌둥이 있다고 하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고 싶다. 아, 북한에도 있지. 김일성과 김정일. ...
밖으로 나와서는 바로 호찌민 생가로 갔다. 투어 관광객들이 엄청 많아서 우리도 좀 섞였는데 입장료가 있었다. 외국인 화살표대로 순진하게 따라갔는데 여긴 표를 구매해야 들어올 수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무료개방 같았다. 표를 구입하며 각 건물 안내도도 받아서 사진으로 나온 곳들은 모두 다 구경했다. 호찌민을 위해 대통령궁을 지었지만 검소한 생활을 위해 작은 저택으로 옮겨서 살았다는 호찌민의 삶의 습관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또한 여기가 좋았던 것 중 하나가 호찌민 묘 뒤쪽에 있어 길가와 떨어져 있어서 조용했다는 점이다.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를 떠나 하노이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니, 쉬면서 산책하기 딱 좋은 곳이었다.
여기저기 구경하며 밖으로 나가 다시 호안끼엠으로 향했다. 이번엔 걸어서... 사파에서 만난 분에게 추천받은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돈이 남아서 무엇을 할까 하다가 아내와 함께 마지막으로 베트남에서 마사지를 받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그곳에서는 크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큰돈은 아닌데 핫 스톤까지 해 준다니 기대가 되었다.
마사지샵에 도착해서 예약을 안 해서 바로 못 받을 줄 알았는데 딱 남녀 마사지사 1명씩 남아 있어서 바로 받을 수 있었다. 발을 위주로 하는 전신마사지였다. 3층으로 올라가 커플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잠시 후 남녀 마사지사가 들어와 마사지를 시작했다. 오, 그런데, 태국에서 받았던 것 보다 훨씬 잘했다. 마사지사 실력이 다른 것 같은 느낌? 아니면 사파에서 너무 힘들게 돌아다니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몸을 만져주니 그냥 시원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여튼 너무 좋았다. 최고는 역시 핫 스톤이었는데 뜨거운 돌로 엉덩이부분부터 등골을 따라 어깨까지 쭉쭉 밀어주는데 피곤이 날아간다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였다. 정말 대박...
마사지가 마무리 되 가면서는 서로 말도 하면서 자기소개도 했다. 그리고 내가 베트남 숫자 노래도 불러줬다. 역시, 이 노래는 여기서도 인기 폭발이었다. 완전 재미있어 한다. 베트남어를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봐서 혼자 독학했다고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마지막으로 온 몸에서 두두둑 소리를 끝으로 마사지를 마쳤다. 아, 정말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1층으로 내려와서 차와 말린 코코넛을 줬는데, 이 차도 끝내줬다. 마사지의 남은 기운을 느끼며 조금 쉬었다. 오후 일정은 점심을 먹고 호텔에 가서 좀 쉬다가 저녁을 먹고 주말시장에서 남은 돈을 쓰는 것으로 정했다.
점심은 닥킴이라는 분짜 맛집에 갔다. 분짜랑 스프링롤만 파는 집이었는데 사람이 정말 많았다. 1층부터 계속 있었는데 우리는 3층에 앉을 수 있었다. 올라가보지는 않았지만 4층, 5층도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이 계속 올라가는 것을 보니... 분짜 두 개와 스프링롤까지 시켰는데 이거 양이 정말 많다. 호안끼엠 근처에서 먹는 분짜는 가격도 싸고 양도 조금이었는데 여긴 조금 비싸서 그런지 양이 정말 많았다. 고기도 특히 너무 많았다. 게다가 스프링롤까지... 맛은 있었다. 분짜, 스프링롤 한 개씩 시키면 딱 일 것 같았다. 결국 스프링롤은 다 먹지 못하고 포장을 했다.
그래도 맛있게 먹고 나와서 저녁으로 먹을 분보남보 가게를 찾아갔다. 근처에 있어서 위치 한 번 보기로... 파란 간판에 이름이 그냥 분보남보라고 메뉴가 딱 적혀있었다. 저녁에 오기로 하고 자리를 옮겨 근처 쇼핑몰 같은 큰 건물로 들어갔다. 쌈지길처럼 매장들이 입점해있고 전시공간들도 있었는데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우리도 대강 구경하고 나왔다. 걸어가면서 과일을 사먹을까 했는데 물어보는 가격마다 너무 비싸다. 음... 바가지인가? 그래서 사지는 않았다.
호텔로 들어와서 한숨 푹 잤다. 저녁때가 되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귀찮기도 하고 이제 거의 다 사진에 담은 것 같아서 카메라는 놓고 나갔다. 역시, 카메라가 없으니 몸이 편하긴 하다. 먼저 시장으로 갔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길을 막고 천막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를 사기 위해 커피 파는 거리로 갔다. 괜찮아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서 G7 가격을 물어보고 구경을 하는데 갑자기 시식을 하라며 커피를 조금 내려줬다. 받아서 마셨는데 오, 완전 맛있다. 뭐냐고 물어보니 사향고양이 커피 + 초콜릿이라고 했다. 오... 정말 완전 맛있었다. 뭘 사야 할지 아직 고민이 돼서 이따가 다시 온다고 하고 나갔다. 그리고 옆옆 가게로 들어갔다. 여긴 한국말을 잘 하는 베트남 여자애가 있었다. 능숙하게 한국말로 우리를 상대한다. 아, 근데 오히려 이러니까 헤어 나오기 힘들다. 그래도 다행히 G7 커피가 아까 거기보다 저렴했다. 다른 커피도 구경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시식을 해볼 수 있냐고 물어보니 가능하단다. 사향고양이 커피로 줬는데 아까랑은 다른 맛이었지만 완전 맛있었다. 이게 뭐냐고 물어보니 100%짜리라고 한다. 음... 역시 비싼 것은 다르군. 60%짜리, 80%짜리는 저렴했다. 그런데 같은 맛은 안 나겠지... 여기도 일단 알겠다고 하고 나왔다.
제한된 남은 돈으로 어떻게 사야 할지 머리를 쓰면서 말린 과일 가게도 가서 시세를 봤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러 낮에 봐 두었던 분보남보 가게로 향했다. 정말 번잡한 길거리를 헤치고 겨우 도착했는데 아까 그 가게가 안 보인다. 여기가 맞는데 왜 안보일까, 문 닫을 시간은 아닌데... 그 앞을 헤매다가 옆 가게 아저씨에게 “분보남보?”라고 물어보니 들어오란다. 아, 맞게 왔구나. 아까랑 뭔가 다른 것 같았지만 들어가서 앉았다. 메뉴를 보니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우리는 분보남보랑 저렴한 쌀 튀김 메뉴를 시켰다. 점심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내가 속이 안 좋아서 별로 입맛은 없었다.
메뉴를 기다리는데 옆 사람들이 밥을 먹고 나간 자리에 돈이 떨어져 있는 것을 봤다. 아까 아저씨가 돈을 내면서 지갑도 아니고 그냥 돈 뭉탱이에서 돈을 내던데 거기서 떨어졌나보다. 직원이 자리를 청소하면서 돈을 밟기도 했는데 보진 못한 것 같았다. 처음엔 1000동 짜리다 되려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2만동짜리였다. 헐. 저건 주워야해. 아내가 내 뒤를 봐주고 내가 앞을 보면서 아무도 안 보는 사이에 내가 얼른 허리를 굽혀 돈을 잽싸게 주웠다. 호호호호. 아싸 득템!
우리의 주문한 메뉴가 나오고 맛을 보는데 완전 맛있다. 쌀 튀김 같은 것은 아주 작은 공갈빵 같은 느낌이었는데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코코넛 향도 많이 나서 완전 맛있었다. 분보남보는 소고기, 양파, 면, 양념이 섞은 비빔면이었는데 독특한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속은 안 좋았지만 그래도 아내랑 완전 맛있게 싹싹 먹었다. 이걸 이제야 알게 되다니 하는 약간의 아쉬움까지 들었다.
가게를 나오면 내일 가게 문 여는 시간도 물어봤다. 일찍 열면 오려고 했는데 그건 힘들 것 같았다. 그런데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까 낮에 봤던 진짜 분보남보 가게가 보였다. 잉. 이건 뭐지. 우리가 먹은 가게 조금 옆에 있었는데 이걸 왜 못 봤을까;;; ㅎㅎㅎ 뭔가 허탈했지만 이 가게보다 싸게 먹었고 맛도 있었으니 그냥 넘어갔다. 대신 여기는 아침 일찍 문을 여니까 내일 아침에 와서 얼른 먹기로 했다.
숙소로 가기 전에는 커피를 사러 갔다. 첫 번째 가게는 문을 닫아서 어쩔 수 없이 두 번째 가게로 가서 G7만 잔뜩 샀다. 내려먹는 것도 사려고 했는데 집에 기구도 없고 해서 그냥 선물용으로만 왕창. 말린 과일도 망고랑 코코넛을 샀다. 가는 길에 돈이 남아서 예정에 없었지만 아까 봐 두었던 예쁜 찻잔 세트도 샀다. 그리고 아내가 사고 싶었던 실로 만든 그림도.
잔뜩 사서 숙소로 돌아오니 짐을 어떻게 싸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무거운 것만 있으면 뭐 막 넣어서 대충 들겠는데 찻잔이 있어서 깨질 위험을 줄이면서 짐을 싸야 했다. 아내와 무게를 적당히 분산하면서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보조로 들고 온 비닐 가방까지 동원해서 찻잔 쟁반까지 모두 다 정리했다. 이제 진짜 내일이면 집에 간다. 너무 아쉽다. 설 명절만 아니면 비행기 표를 연장하고 더 놀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집에 가야만 한다. ... 이렇게, 여행의 진짜 마지막 밤이 지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