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야기/독후감 IV

북유럽의 모나리자, 그 속에 감춰진 이야기

inhovation 2015. 9. 28. 16:36

No. 171

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강 펴냄


  2013년 초,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공원에서 처음 이 그림을 봤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림인데!'라는 생각을 했으니까, 엄밀히 따지면 처음 본 거는 그 이전일테고, 내 기억에 뚜렷이 남은 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봤을 때였던 것이다. 진지 귀고리 소녀. 그림의 제목답게 이 그림은 검은 배경에 진주 귀고리 소녀가 있는 것이 전부이다. 동그랗게 뜬 눈, 오똑한 코, 붉은 빛을 띄지만 과하게 빨갛지 않은 입술, 어둠 속에서 살짝 빛나는 진주 귀고리. 검은색의 배경이 모든 것을 튀지 않고 도드라지게 만들어 주고 있다.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이 작품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이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그는 오직 35점의 작품을 남긴 것 이외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진주 귀고리 소녀'도 작가의 자유로운 구성을 통해 흥미 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



  주인공인 그리트는 아버지가 일을 하게 되지 못해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집 하녀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의 화실을 청소하게 되는 일을 비롯해 온갖 집안 일을 하게 되는데, 그리트를 둘러 싸고 베르메르의 부인 카타리나, 그의 장모 마리아 틴스, 그리고 줄줄이 딸린 그의 자식들, 게다가 또 다른 하녀 타네커와의 복잡한 관계가 시작된다. 그러나 세 남자와의 관계가 더욱 복잡하게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거래하는 푸줏간의 아들 피터, 주인 요하네스 베르메르, 그리고 그의 그림을 사는 주 고객인 반 라위번이 바로 각각 그 주인공들이다.


  우선, 반 라위번의 사랑은 음흉함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같이 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니 그 당시 그림 속에 자기 자신의 모습이 나온 다는 것은 남들에게 뭔가를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반 라위번은 항상 요하네스 베르메르를 통해 자신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주문했고, 그리트가 하녀로 온 이후에는 그녀와 함께 한 그림에 나오길 그에게 요구했다. 권력을 손에 쥐고 가끔은 그리트를 겁탈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주인은 그녀를 반 라위번과 함께 그림에 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그림 철학이 매우 확고했다. 빨리빨리 그려내면 돈이라도 많이 벌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해 그의 장모는 항상 아쉬움과 함께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고 나면 그 누구도 그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반 라위번의 그림을 그리다가 그리트에게 새로운 작품을 위해 포즈를 잡길 요구하고 결국 그의 부인만 착용했던 진주 쥐고리까지 하게 한다. 강요는 없지만 그녀를 가장 많이 사로잡은 것 같은 사람은 바로 그였다.

  피터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트와 잘 되어 결혼까지 원하는 인물이다.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으로 계속해서 튕기는 그리트를 일편단심으로 좋아한다. 너무 순수한 마음에 창문 밖에서 고백까지 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인물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결국 그리트와 잘 되긴 한다.


  책을 읽으면서 사람 사이에 얽힌 관계, 앞서 설명한 그리트와 세 남자의 관계가 제일 흥미로웠다. 특히 그리트의 주인, 요하네스 베르메르와 그리트의 관계는 강압적이지 않았지만 제일 강력한, 육체적인 접촉은 없었지만 그리트를 제일 많이 육체적으로 구속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앞 부분에서 그의 존재는 베일에 싸인 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리트는 항상 그의 화실을 청소하지만 그 곳은 언제나 작업을 마친 빈 공간일 뿐이다. 존재를 드러낼 때도 계단가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전부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될 수록 그와 그리트가 마주하는 순간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리트의 청소를 비롯해 다른 것들이 마음에 들어서 그랬는지 그는 그리트를 자신의 옆에 두고 싶어 했다. 아내 카타리나의 출산으로 그리트는 결국 그의 작업실 안에 있는 옥탑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고 그와 함께 그림 작업에까지 참여하게 된다. 마치 썸을 타다 연애를 시작한 것과 같이...

  그녀를 그리고 있을 때 그는 그녀의 육체를 완전히 구속한다. 그녀와 그 사이에 항상 일정한 거리는 있지만 그는 그녀의 모든 몸을 말 한마디로 조종한다. 고개의 각도, 입을 벌리는 정도, 귀를 살짝 보이라는 것, 결국 항상 가리고 있었던 머리를 보이라는 것까지... 그러나 그리트는 머리를 보이는 대신 푸른색, 노란색 천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싼다. 하지만 절정은 진주 귀고리를 귀에 다는 부분이다. 무언가 계속 부족했는데 그 해결책으로 결국 그의 아내의 진주 귀고리를 하녀 그리트에게 하게 하는 것이다. 귀도 뚫지 않은 하녀 그리트는 결국 국소 마취 약품을 구해 불로 달군 쇠로 귀를 뚫는다. 기절까지 해 가면서 양쪽 귀를 뚫고 그의 모델이 된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리트는 그에게 귀고리를 닳아주길 요청하고 그는 그의 귀를 잡고 귀고리를 그녀의 귀에 넣어준다. 그림에 나오지 않는 반대편까지도.


  내 의자로 그가 걸어왔다. 턱 선이 죄어들어 오면서 나는 가까스로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부드럽게 내 귓볼을 어루만졌다.

  숨이 막혔다. 마치 물 속에서 숨을 멈추고 있는 것 같았다.

  엄지와 검지로 부풀어오른 내 귀를 문지르던 그가 귓볼을 팽팽히 당겼다. 다른 한 손으로는 귀고리의 고리를 잡고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불에 덴 것 같은 아품이 지나가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턱과 목을 쓸어 내리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얼굴 선을 따라 뺨으로 왔을 때 눈물이 넘쳐흘러 그의 엄지 손가락을 타고 넘어갔다. 그는 엄지로 내 아래쪽 입술을 만졌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핥았다. 소금 맛이 났다.

  두 눈을 감자 그의 손가락들은 나를 떠났다. 다시 눈을 떳을 때 그는 이젤 앞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팔레트를 들고 있었다. (p. 260-2)


  이 장면은 전혀 성적인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로 하여금 성적 관계보다 더욱 깊은 그와 그리트의 관계가 맺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육체적으로 그리트를 정복하진 않았지만 귀고리를 그녀의 귀에 달아줌으로 인해 육체를 넘어 그리트의 정신까지도 완전하게 사로잡은 것이다. 억지로 그녀를 탐하고 싶어하는 반 라위번 보다, 그녀에게 청혼했던 피터보다 조용하고 강하게 그녀를 가장 먼저 정복한 것이다. 이는 반대로 그리트에게도 많은 의미를 줄 수 있는데, 그녀를 억압하는 그의 아내 카타리나, 자녀를 계속 낳긴 해도 그의 성실한 사랑을 얻지 못하는 것 같은 그녀보다 그리트가 그에게 더 소중한 존재로 부각되는 것 같은 느낌도 주기 때문이다. 

  그림이 다 그려지고 나서 그리트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의 아내가 그 그림을 먼저 보고 반 라위번의 집으로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클라이막스를 숨막히게 넘긴 이야기는 급격히 전개되어 그리트는 그의 집을 도망치듯 떠나게 되고 시간은 10년 후를 가리키며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어내고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의 이야기가 결코 이 그림이 그려진 뒷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사실적인 묘사와 서술로 인해 너무나도 강한 착각이 들게 했다. 마치, 진주 귀고리 소녀가 그려진 배경은 그냥 이 소설의 내용이 전부일 것만 같은 착각.


  소설을 읽으며 세 남자의 이야기 외에도 흥미로웠던 점이 몇가지 더 있었다. 갈등 관계들은 선배 하녀 타네커와, 그의 아내 카타리나, 장모 마리아 틴스와의 관계를, 그 외에 관계적인 측면에서는 그의 많은 자녀들 각각과의 관계, 그리트의 가족과의 관계도 흥미로웠다. 책의 편집적인 면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데, 중간중간 페이지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그의 그림들이 전개되고 있는 이야기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면서 계속해서 페이지를 앞, 뒤로 넘겨가며 그림과 함께 이야기를 읽는 게 매우 재미있었다. 진주 귀고리 소녀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진주 귀고리 소녀

저자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출판사
| 2010-04-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7세기, 네덜란드는 말 그래도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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