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170
수세기 전부터 인간은 우리를 땔감이나 종이의 원료로만 생각해 왔어. 하지만 우리는 죽어 있는 물건이 아니야.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우리는 살아 있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지각하고 있어.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고통을 받고 기쁨을 느껴. (p. 285)
나무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이야기 하나는 '완전한 은둔자'라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귀스타브는 그의 아버지가 어렸을 때 자기에게 말 한, '네 안에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그러했다. 네가 하는 일은 그저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배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말에 빠져 명상(사고)에 푹 빠져들었다. 그래서 그는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뇌만 분리하여 영양액 속에 보관하기로 했다.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의 뇌(사고)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의 사고는 점차 깊어지고 넓어졌지만 그의 가족들은 죽고, 그를 직접적으로 모르는 후손에까지 영양액에 뇌가 담긴 병(사고로만 존재하는 귀스타브)이 전해졌다. 어느 날, 그의 자손이 친구들과 노는 중에 친구들은 귀스타브의 뇌를 공처럼 가지고 놀다가 쓰레기통에 버려지게 되고 허무하게 개에게 먹혀 귀스타브는 사라지고 만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우선, 너무 재미있었다는 기분이 첫째였다. 그리고 과연 이 소설을 통해 일차적인 재미 그 이상의 것은 무엇일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가능성의 나무, 이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 같다. 최근에 빅데이터 관련 책을 읽었는데, 데이터를 통해 세상의 현상들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말 없는 친구, 조르주의 이야기도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관련된 실험들이 이미 충분히 있다. 소설의 내용에서도 나왔지만, 식물과 비 언어적 의사소통, 교감이라고 해도 될까, 이런 것들이 명확하게 설명은 되지 않아도 어느 정도 가능성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완전한 은둔자, 이거는 현실의 과학적인 세계 보다는 철학적인 문제랑 조금 더 가까울 것 같다. 이 이야기 역시 얼마 전에 읽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있는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몸이 죽는 것이 죽음인지, 아니며 우리의 생각, 사고까지 죽는 것이 완전한 죽음인지 철학적인 난제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귀스타브는 과연 죽은 것인가?'라고 했을 때, 귀스타브의 사고를 벗어나면 그는 일반적으로 죽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사고는 여전히 존재하며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조금 복잡해 진 것 같기도 한데, 결국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 우리의 삶과도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판이 2003년, 지금보다 12년 전에 나왔는데 그 땐 훨씬 더 상상 속의 이야기로만 존재하며 현실화 될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12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실현 가능한 이야기가 되었다는 것은, 또 다시 10여년이 지나면 이미 실현 된 이야기도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음, 과학기술의 발전을 이끌어 가는 것은 그럼 소설이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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