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 이야기/세온하온

[아빠가 쓰는 육아일기] 생후 77일(오늘의 이야기, 그리고 그동안)

inhovation 2017. 3. 25. 22:36


2016.2.1.수 (생후 77일)
PM 11:17
아내가 아프다. 며칠 전부터 목이 아프다고 하더니, 기여코 머리에 물수건을 올리고 한두시간 전에 잔다는 말도 없이 누워버렸다. 들어가보니 아기 재우고 옆에 누워있길래 문을 다시 살짝 닫고 나왔다. 아까 열을 재 보니 37.3도. 미열이 있는 정도다. 약국에서 약을 살지 말지 수없이 고민했지만 (세온이가 가끔 모유를 먹어서) 결국 마스크만 사서 꼈다. 아파도 세온이 때문에 약도 못먹는 아내. 병원을 갈지 말지 고민하면서도 자기 몸 걱정보다 얼른 나아야지 세온이한테 옮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아내. 이런 거 보면 진짜 아내는 엄마가 다 된 것 같다.

남편인 나는 퇴근 후, 오늘은 오자마자 세온이 똥 치우는 거를 도와줬다. 그리고 분유 온수기에 물이 떨어져서 물을 채웠다. 수요일이라 아파트 장이 열려서 시금치, 마늘, 계란, 달걀, 두부, 사과를 사왔다. 약국에서 아내 마스크를 사왔다. 아내가 아기를 보는 동안 저녁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사온 계란으로 아내가 좋아하는 계란찜, 급히 미역을 불리고 얼린 소고기를 꺼내 미역국, 엊그제 사 놓은 양상추와 함께 토마토, 마스카포네치즈를 곁들이고 유자, 올리브오일, 발사믹식초를 섞어 만든 드레싱과 햄프씨드를 뿌린 샐러드, 주말에 만든 일식간장에 재운 미역, 어머니께서 몇 달 전에 주신 멸치, 김치냉장고에서 오랜만에 나온 김치까지 정갈하게 접시에 담아 식탁에 차렸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 순간, 세온이가 울었다. ... 아내에게 먼저 밥을 먹으라고 하고 내가 들어가서 분유를 줬다. 그래도 오늘은 악 쓰기 전에 잘 먹인 것 같다. 분유를 다 먹고 소화시키고 있을 때 밥을 다 먹은 아내가 들어와서 교대해줬다. 밥을 먹고 세온이랑 같이 좀 놀았다. 그러다 잠투정 하는 것 같아서 재우려고 했는데 실패. 결국 아내가 세온이를 재우는 것 같았다. 거실에서 한라봉 한 개 까 놓고, 아내 한약을 데웠다. 잠시 세온이를 재우고 나와 한약을 먹고 꺼내 놓은 고구마로 맛탕을 먹고 싶다고 해서 이따 해주기로 했다. 그동안 나는 설거지를 하고, 세온이 빨래를 하고, (그 사이에 아내는 세온이를 재우고 잠들었음) 시금치로 일식간장에 재워놓으려고 다듬고 데치고 썰고, 빨래 다 되서 널고 다시 우리 빨래를 하고, 목욕하고 나와서 고구마를 (맛탕 대신 내일 간식으로 먹으라고) 압력솥에 찌고, 세온이 가재수건 삶고 식혀서 널고.
* 아내는 이걸 읽고 결국 자기 자랑이라고 했다. ... 'ㅡ'a

11시가 되었다. ... 그동안, 이 패턴에서 크게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세온이가 태어나고 집에 와서 3인 체제가 시작된 이후부터 아내와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삶을 살아야 했다. 아니, 예상은 했어도 실제 그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큰 차이인 것 같다. 하루종일 아이와 씨름하는 아내. 얄밉게도(?) 하루 종일 울고 보채며 힘들게 하는 날이 있으면 잠투정도 안하며 잘 자면서 편하게 해주는 날도 있고, 똥을 한바가지 싸서 등까지 다 묻어서 고될 때가 있으면 애교를 부리며 짓는 눈웃음에 피로가 싹 날아가는 때도 있다. 아내도 나도, 힘들지만 세온이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기쁨을 느끼며 지내는 것 같다. 하긴, 큰 병은 아니었지만 17일 됐을 때, 신생아중환자실에 입원해서 졸였던 마음에 비하면 이렇게 건강하게 하루하루 커가는 게 얼마나 큰 감사함이고 또 행복인지. 힘든 날, 힘든 때가 있어도 행복한 순간들에 감사한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나의 퇴근 후 자유 시간은 확 줄었지만, 그래도 세온이를 돌보며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좋다. 항상 말하지만 얼른 커서 밖에 같이 돌아다니고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지나가버리는 하루하루가 너무 아쉽기도 하다. 다시는 오지 못하는 오늘 하루, 바로 이 순간. 아내의 좌우명처럼 '지금 이 순간, 이 느낌을 기억하자'

오늘 했던 일 중에서 청소랑 젖병 소독 등등이 빠졌지만, 내일이든 언제든 하게 되겠지. 그동안 했던 것 처럼. 주말에도 시간이 많은 것 같지만 은근히 또 집안일 하며 아기 돌보는 일에 동참하면 하루가 후딱 가버린다. 그래도, 즐거웠다. 앞으로 즐겁겠지. 아내는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입버릇 처럼 말하는 부족한 남편이지만, 아내에게 잘해야지, 그리고 세온이에게도.

매일매일 육아일기를 남기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썼던 것 처럼 여유롭게 쓸 시간이 없고, 최근 며칠, 밀려서 쓰려고 하다 보니 기억도 잘 안나고 생생한 느낌도 안나서 그냥 맘 편하게 가끔 남기려 한다. 언젠간 잊혀질 수도 있는 하루하루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아린 것 같지만, 나에게, 또 아내에게 행복하고 즐거운 날들로 채워지겠지. ...

어제, 먹고 싶다고 얘기했던 쑥떡을, 나는 먹어봤다는 이유로 별 생각 없이 넘긴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고맙게도 오늘 먹고싶었는데 그렇게 말해서 서운했다고 말해줬다. 주문한다고 해 놓고 바빠서 전화도 못했는데 내일은 꼭 주문 해서 아내랑 쑥떡을 먹어야겠다.

그리고, 100일을 어떻게 챙길지 아내는 많이 생각하며 알아보는 거 같은데 신경써주지 못하고 있어서 미안하다. 아내가 몇 가지 계속 얘기하긴 했는데 경제적인 부분도 걸리고, 사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기도 하고...

이래저래 맘이 복잡한 밤이다. 12시 17분이네. 자야지. ...

아, 세온이 엄마, 사랑하는 아내, 얼른 낫길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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