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야기/독후감 III

박사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학문을 할 것인가

inhovation 2016. 3. 4. 09:22

No. 160

직업으로서의 학문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올해 2월, 2년 간의 석사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학위를 받았다. 회사를 다니지 않았다면 소위 '고학력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했겠지만, 그래도 힘들지만 직장생활을 병행한 덕분에 '자동취업' 정도로 학교에 석사학위 취득자 취업률에도 일조를 하고, 개인적으로도 취업에 대한 불안감은 갖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끊임없이 고민이 되지만...) 석사를 하고 나니 자연스레 눈은 박사로 향해 있었고, 그럼 어떻게 박사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회사 일하는 것 때문에 수 많은 박사님들을 만나게 되고 얘기하게 되니 나 역시 박사에 대한 욕심이 시나브로 마음 속에 생기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몇 년 전, 아는 박사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얘기해 주신 내용인데, 일 하다 보면 발에 치이는게 석사라고, 박사를 꼭 하라고 했다. 그 땐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것 같다. 박사학위 받고 좀 더 나은 신분, 나은 직장을 갖고 살라는 의미? 또는 석사에 만족하지 말고 박사까지 도전해서 열심히 하라는 의미? 뭐... 어떤 뜻인지 아직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여튼,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6개월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 수 많은 내적 갈등과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 바로 막스 베버의 이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세 번이나 읽게 되었다. 두께가 얇아서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내용이 어려워 3번 씩이나 읽은 것이 더 큰 이유다. (아직 몇 번 더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더위가 찾아오기 전 여름이었던 것 같다. 종종 만나는 형들과 피자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있는 내용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 읽어봤던 기억은 나는데 내용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집에 가서 책장을 찾아보니 책은 없었다. (옛날엔 빌려서 읽었던 건가...) 동생한테 연락해 보니 동생 책이 있어서 빌려서 2번 읽었고, 세 번째 읽을 때는 내가 사서 읽었다. 일단, 동생 책에 메모가 너무 많이 되어 있었고(동생 관점...), 번역이 맘에 안들었다. 인터넷을 찾는 중 나남출판사 전성우 선생님의 번역이 괜찮다는 글이 있어 바로 샀다. 좋은 점은, '직업으로서의 학문' 만 있어서 얇았고(다른 책은 '직업으로서의 정치'랑 같이 있음), 역자 주랑 내용에 각 장을 구분해 놓아서 읽기에 편했다. 그리고 책 두 권을 놓고 비교는 직접 못해봤지만, 번역이 조금씩 다른 점도 있는 듯 했다. 여튼, 읽게 된 동기는 여기까지...


  책의 앞부분은 조금 쉬운데 뒷 부분은 조금 어렵다. 미국과 독일의 사례에서 각각 출발하는 막스 베버는 책 제목답게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와 각 나라에서 어떤 현실 상황을 수반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학문을 직업으로서 시작하고자 할 때 독일은 사강사로 시작하며 고정된 봉급이 없어 학자의 경력은 금권주의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미국은 조교수로 채용되어 고정된 봉급으로 관료적 체제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강사는 강의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자율권(?)을 갖지만, 조교수는 엄청난(?) 강의 양을 떠맡아야 한다는 차이도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식 교육 체계를 닮아 있으므로 "미국의 사례=대한민국의 이야기"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100년 전 독일에서도 학계 현실(?)이 미국과 비슷해지고 있다는 것을 꼬집고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대학제도가 많은 학문분야에서 미국화되고 있음을 분명히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의학이나 자연과학의 큰 연구소들은 <국가자본주의적> 기업입니다. 이 연구소들은 대규모의 경영수단 없이는 관리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적 경영이 시행되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상황이 여기서도 똑같이 발생하는데, <노동자의 생산수단으로부터의 분리>가 그것입니다. 노동자, 즉 조교는 국가가 제공하는 노동수단에 의존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공장의 고용인처럼 연구소장에게 예속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연구소장은 전혀 꺼리낌없이 그 연구소가 <자신의> 연구소라고 생각하면서 연구소를 관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교의 위치는 흔히 <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치 또는 미국대학의 조교수의 위치와 유사하게 불안정합니다. (p. 24-5)


  이러한 상황 속에 그럼, 직업으로서 학문을 갖는 (조)교수 또는 연구소의 소장은 어떻게 되는가?


"...사강사가, 더구나 조교가 언젠가 정교수나 심지어 연구소 소장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을지는 그야말로 요행에 속하는 문제라는 상황 말입니다. 물론 요행만이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요행이 엄청날 정도로 크게 지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요행>이 그 정도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직업경력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p. 25-6)


  요행. 처음에 '요행'이라는 단어 때문에 조금 고민을 많이 했다. 일반적으로 나는 요행이라는 단어를 '요행을 바라지 말라' 라고 쓸 때의 요행으로 생각해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요행은 "1. 행복을 바람, 2. 뜻밖에 얻는 행운"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는 없었다. 두 책 모두 왜 '요행'으로 번역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그냥 '운' 정도로만 번역해도 괜찮을 것 같다.

  교수나 연구소장이 되는 일은 '운'에 달린 일이다. 실력에만 달린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막스 베버 역시 자신은 정교수로 채용되었으나 자신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정교수로 채용되지 않고 있는 현실 상황을 예로 들며 설명했다. 그렇다면... 교수나 연구자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요행'을 바라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학문의 외적 조건으로 능력과 요행을 말하고 있는 저자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는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은 평범한 인재들이 해마다 당신보다 앞서 승진하는 것을 보고도 내적 비탄이나 파멸 없이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p. 32)


  이어서는 내용에서는 학문의 내적 조건과 근대학문에 대해 죽- 설명하고 있다. 계속 읽다 보면 어려운 말들도 나오면서 '가치다신교'를 비롯해 근대 사회의 의미에 대해 계속해서 논하고 있다. 최근 다시 만난 모임에서 들은 얘기와 책을 좀 더 읽고 나서 정리한 내용을 쓰자면, 근대사회 들어 그동안 수백년을 지배해 절대 믿음, 기독교 문화가 깨어지며 근대 사회에는 많은 논의들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유명한 니체의 '신은 죽었다'를 시작으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문 연구는 어떤 방향을 가지고 학자들은 어떤 생각으로 연구를 지속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테고,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해 논한 강연이 바로 이 책이 아닌가 싶다.



  내용적으로는 아직 정리가 덜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왜 박사를 생각하는가? 단순히 조금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고 나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책에서 말하는 직업으로서 학문을 갖기 위해서인가? 석사, 박사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박사' 공부 하는 것 가지고 그런 철학적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학위 하나 더 갖고 세상을 살면 되는 거지 '뭐 그리 대단한 일' 한다고 그런 고민을 심각하게 하느냐고 할지도... 그래도, 고민하고싶다. 박사학위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선택하는 길에 대해... 그러면, '요행'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책을 읽고 생각하고, 또 주변의 몇몇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운'도 실력이 따라줘야 바랄 수 있는 것 같다.


2014년 9월 11일 @inhobook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