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번 정리해서 글로 남기고 싶었다. 교회를 옮겨도 되는지 고민하는 사람(청년)들이 아주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그리고 그동안 나의 신앙생활도 한 번 돌아볼 겸... 큰 고민을 하고 한 번 교회를 옮겼을 때 (7년 전) 쓰려고 했는데 이래저래 못쓰다가, 이번에 두 번째로 교회를 옮기게 되면서 정리 해 본다.
내가 두 번이나 교회를 옮긴 이야기 1
1993년 4월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1학년 부활절. 뭔 이유에선진 모르고, 그냥 93년도에 이사를 가면서 또 국민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교회를 가고 싶다고 어머니께 말씀 드렸던 것 같다. 그때 우리 건너편 3층 집 아주머니가 어떤 교회의 권사님이라 그 분을 따라서 교회에 처음 갔었고, 잘은 기억 안나지만 부활절직전인가 그랬던 것 같다.
25년 넘게 해온 신앙생활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겠고, 교회를 옮기게 된 이야기에 대해서만 정리를 해 보려고 하니 많은 이야기는 패스 하고...ㅎ
첫 번째 교회에서는 2012년 6월 정도까지 다녔다. 사실 2012년은 극강의 혼란(?) 속에서 예배를 빠진 적도 많고, 그렇게 잘 다니던 청년부도 안가고 대예배도 가는둥 마는둥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도 벌써 7년 전. 첫 번째 교회에서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두 번째 교회)로 옮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건축’과 ‘세습’이었다.
건축
일단, 2005년, 대학을 들어가고 교회에서는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 내 기억에... 찬반으로 막 나뉘었고, 어떤 권사님, 집사님들은 이때에도 교회를 옮긴 분들도 여럿 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등부 부장교사를 할 정도로 핵심급(?)이신 분들도 힘들어 하시면서 교회를 옮기셨다. (나보다 더 큰) 어른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나는 잘 몰랐고, 그냥 건축 헌금을 한다는 그런 뜻 아래, 청년부 형 누나들하고 시험기간에 교회에서 밤을 새며 공부하고 장학금을 받으면 그걸 건축헌금으로 드리기도 하고, 1-2번(?)은, 지금도 적지 않은 적금을 깨서 건축헌금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새성전 터에 몇번이나 가서 예배도 드리고 일도 하고.
잘 기억은 안난다. 언제 새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지. 아내랑 2007년부터 교제를 시작했는데, 이때 새성전에서의 여러 추억들(교회학교 교사를 같이 했던 것)이 있는걸 보아, 살짝 이때부터 내 고민이 시작됐던 것 같다. 일단, 아무리 헌금을 해도 어려운 교회 재정. 너무 어린 생각이었을까. 장학금 드리고 적금깨서 드리고 하면 건축도 착착 잘 될 것이라는 것이. 교회 건축도 너무 무리해서 진행이 됐고 수백억의 부채에, 매주 나가는 이자만 수천만원이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더 고민이 됐던 이유는 이런 상황 속에서 전교인, 특히 양육을 받아야 하는 교회학교와 청년부까지 너무 힘들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지원되는 예산이 0이었다. 진짜 0. 교회학교도 어려워서, 당시 내가 총무교사를 했었는데, 부장교사 선생님께 적금을 깨서 고등부를 위해 써 달라고 드린 적도 있었다. (왜케 적금 많이 깼지...ㅋㅋㅋ) 청년부는 자체 회비를 걷었는데, 이게 그냥 셀모임에서 ‘우리 회비 걷어서 회식하자’ 이런게 아니라, 전-체 청년부가 회비를 내서 기본적인 지출을 알아서 해결하는 시스템이었다. ‘청년회’니까 뭐 회비 걷는게 이상하지 않을수도 있었는데, 난 너무 이상한 것 같았다...ㅋ 교회 헌금 드리는 것으로 이런 지출을 충당하는 것인데, 청년부 헌금은 교회에서 다 가져가고 너희들은 알아서 자생하라는 식. 주변에 어떤 교회는 청년부의 자립을 위해 청년부 헌금은 다 청년부에서 관리하게 한다고 했었는데, 참 이 시스템이 부러웠다.
여튼, 대략 2007년부터 이런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제대로 양육도 못받고, 또 양육을 받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어려웠다. 물론 돈으로만 양육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예산 지원도 받지 못해 사람들이 양육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익사업에만 고민하고 투입되고 그랬다. 물론 나도 어쩔 수 없이, 청년부 회장을 하면서 이런 일들을 많이 기획도 하고 실제 하기도 했었다. 새벽기도 때 나와서 촛불 판매. 졸업식 시즌에 폴라로이드 사진 판매. 등등 왜그랬을까, 하며 후회되는 정도는 아닌데, 참, 그럴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안타깝기는 하다.
즉, 건축으로 인한 교회 재정 악화, 이로인해 기본적인 성도들의 신앙교육 소홀. 이 프로세스가 내가 교회를 떠나게 만든 첫 번째 원인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세습
요즘 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세습이 바로 내가 첫 번째 교회를 떠난 두 번째 이유이다. 이것도 사실 청년부에 올라오고 나서는 처음에 잘은 몰랐다. 구성전에 있을 때, 담임목사님 아드님이 미국에서 오셨다. 미국에서 신학을 하시고 거기에서 교회를 하고 계시다가 그때 교회로 오신 것이었는데, 청년부를 담당하셨다. 그리고 완전 센세이셨이었다. 좋은 의미에서. 정말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더 큰 어른들은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건축과 함께 세습도 시작되고 있었다는 것을. 담임목사님 은퇴 전에 으리으리한 교회를 짓고 아들에게 물려주겠다는 계획. 그리고 새성전으로 옮기고 나서 1년 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세습식...ㅋ은 아니고, 은퇴식과 취임식을 했던 것 같다. 은퇴하시는 담임목사님께는 장로님들이 돈을 모아서 볼보 승용차를 사서 드렸다고 하는 것들 들었다. 안전하다고 해서? (그래서 내 이미지로 아직도 볼보차는 진짜 안전한 차. 라는 게 박혀있다.ㅋ)
여튼, 사실 세습이란 것도 별로 개념이 없었다. 단지 나쁘다 나쁘다 하는데 뭐가 나쁜건지 잘 몰랐다. 나는 세습 그 자체보다 그때 교회에서 ‘세습으로 인한 권위적인 권력까지의 이양’이 더 최악으로 다가왔다. 당시 교회는 지역에서 100년도 넘은 교회였고, 아버지 담임목사님이 거의 40년을 담임으로 있었다. 그래서 거의 다 꿈벅 하는 그런 분위기. 장로님들도 청년때부터 봐 왔던 목사님이고 하니까. 그런데 이게, (하 한숨이 나오는데...ㅋㅋ) 목사님을 잘 섬기고 그런 분위기, 그 이상이었다. 거의 목사님을 모시는...? 아니, 그치. 목사님은 잘 모셔야 하는데...ㅋ 거의 성도는 완전 일꾼이다. 일반 성도는, 그치, 일꾼도 맞긴 한데, 아니, 거의 막노동꾼...?ㅠㅋ... 비유가 적당히 안된다. 경험으로 예를 들어보면.
부흥회 기간,
아들 담임목사님(목) : (전화로) 인호야~ 뭐하니~
나 : 집에 가고 있습니다.
목 : 교회와서 부흥회 홍보 해야지~
나 : 네 알겠습니다. (너무 순종적...ㅠㅋ)
교회 가면, 아들 담임목사님은 안계셔서 전화 드려보면 어디 나가심. 교회 봉고차에 확성기가 달려있었는데, 그거 틀고 동네 한바퀴 돌고 오라고 하심. 그러면 난 교회 봉고차 키 받아서 확성기 틀고 과일파는 아저씨 처럼 동네 구석구석 돌고 옴...
청년부 모임 끝나고 집에 가는데,
부목사님(부) : 인호 청년, 어디에요?
나 : 청년부 끝나고 집에 거의 다 왔어요.
부 : 갑자기 회의가 있어서 회장들(남선교회 여선교회 이런 분들 포함) 다 모여야 해요. 빨리 오세요.
나 : ...네.
진짜 이때는 교회 가면, 운전해서 가고 있었는데 중앙선 침범해서 사고내고 가기 싫을 정도였음. 다시 교회로 돌아가면 많이 오지도 않고, 나는 거의 필요도 없는 회의.
일화는 많다. 교회 부흥회 같은거 하면 전단지를 동네 차들마다 다 와이퍼에 꼽고 다닌 적도 있고(스킬도 많이 늘음), 교회 수영장을 만들었는데(에어바운스로 마당에다가) 돌아가면서 경비세우게 하고(모기 엄청 물림), 교회에서 일좀 해야 하면 목사님들이 엄청 쉽게 막 불러서 시키고 그랬다. 내가 지금 전단지 좀 꼽고 모기 물려서 이런 글을 쓰는 건 아니고, 너무 일상적으로 많았어서 잘 기억도 안난다. 거의 토-일은 교회 가면 청년부 활동과 함께 자연스레 뭔가 노동을 했었다. 물론 성도가 교회를 위해 일해야 하는 부분도 있는데, 이게 그 늬앙스나 분위기가 좀 다르다. 첫 번째 교회에서는 진짜 부리듯 시켰다. 나중에 쓰겠지만, 진짜 두 번째 교회 옮기고 나서 충격받은게 엄청 많다. 너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있었던게 많아서.
여튼, 세습 이야기를 쓰고 있었는데, 세습으로 인해 전 담임목사님의 그런 권력까지 아들 목사님에게 고스란히 내려온 것을 보고, 그리고 아들목사님이 오기 전부터 있었던 넘버2, 3 목사님들이 그대로 다른 교회로 가는 그런 모습들, 여러가지를 보며 좀 너무하다 싶었다. 사실 넘버 2, 3 목사님들도 교회 청년들을 편하게 부리신 것도 있긴 했었다...ㅋ 목사라고 해서 항상 가난해야하고 그런건 아닌데, 첫 번째 교회에서는 거의 제왕적 위치에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이렇게 1. 건축으로 인한 재정 악화, 그로 인한 기본적인 신앙생활에 집중하지 못한 것. 그리고 2. 세습으로 인한 권력의 이양, 교회 성도들이 제왕적 목회자의 권력에 순응하는 모습들. 이런 거로 인해 나는 고민에 빠졌던 것 같다. 내가 처음 다닌 교회이고, 이 교회에서 이렇게 자라왔는데, 이런 모습들이 과연 옳은 것인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못해도 3-4년은 고민을 했다. 왜냐면, 당시 고등부 담당으로 몇 개월 계셨던 목사님과는 아주 잘 맞아서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 받는데, 당시에 교회를 떠나시고 나서도 1년에 1-2번씩은 꼭 같이 만나며 이 문제에 대해서 수년 동안 고민하고 들어주시고 조언해 주셨다.
고민의 초기, 교회를 옮기고 싶다는 내 말에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교회를 옮기는 것은 네 자유다. 그러나 그 문제의 본질이 뭔지 고민해 볼 필요도 있고, 그렇지 않고 교회를 옮긴다면 너는 다음에 비슷한 문제를 겪었을 때 또 다시 교회를 옮기는 것으로 문제를 회피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진짜 고통스럽게 몇 년을 더 고민했다. 그러면서 청년회장도 했고, 찬양팀 리더도 했고, 교회 생활을 게을리 하진 않았다. 청년회장을 하면서 마음이 맞지 않는 임원들과도 어떻게든 성경적으로 청년부를 이끌어 가려고 노력했었고, 찬양단 사람들과도 매주 신앙의 핵심을 함께 공부해가며 바로 서 보려고 노력했었다. 찬양단 사람들과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았는데, 이때 사람들이 거의 다 지금 교회를 옮겼다. ...?ㅋㅋ 이거 때문에 마음이 잘 맞았다는 것은 아니고.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며 이 교회에서 이렇게 양육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갈급함이 컸다.
차기 회장에게, 나는 더이상 찬양팀으로 섬기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또 당시 우리 안에 리더를 할 사람이 없어서 리더 선택의 숙제까지 다 던져주고 나는 2012년 1월부터 완전 자유의 몸이 되었다. 대학교를 졸업하는 시기와 동일하기도 했고,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토요일에 수업도 있었거니와, 토요일에 교회를 가지 않는 다는 것에 대한 어색한 자유로움, 주일 아침에도 늦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너무 이상했다. 청년부에 올라와서는 7년 동안 매주 토/일은 교회생활이 전부였는데...
마음도 다 떠난 교회에 청년부 모임도 가기 싫었고,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예배만 좀 갔지만(갔니?라고 물어보시면 네.라고 대답하기 위해) 맨 뒤에 앉아있거나 늦게 갔다. 동생 말로는 5월 가정의달 예배 때, 나만 따로 앉았는데, 기도하는 시간에 어머니가 그렇게 우셨다고 한다. 첫째 아들의 힘듦을 지켜보기 힘드셨겠지. 그러나 나는 그런 어머니의 기도에도 마음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교회를 새롭게 어디로 다녀야하나,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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