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에서는, 특히 루앙프라방에서는 아내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다. 아침에 2층 발코니가 있고 큰 창문 1개에 작은 창문도 2개나 있는 숙소로 옮기고, 원래 하루만 자려고 했는데 그냥 또 너무 머무르고 싶어서 이틀을 머문다고 해버렸다. 참 우리도 지금 대책이 없긴 하다.
숙소에 짐을 풀고 늦은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비가 갠 후의 루앙프라방은 또 새로운 매력이 있었다. 골목길에서 또 사진을 찍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샌드위치를 먹을까 하다가, 숙소 드나드는 골목이 루앙프라방에서 유명한 조마(Joma)베이커리 바로 옆이라서 한 번 가보기로 했다. 내부는 깔끔했고, 우리나라 카페 같았다. 차이점이라면 저렴한 가격 정도? 아내는 많이는 못 먹을 것 같아서 가볍게 내 손바닥만 한 하와이안피자 1조각, 치즈케이크 1조각, 에스프레소 1잔, 따뜻한 화이트 코코아 1잔을 시켰다. ...? 이렇게 시켰는데도 우리나라 돈으로 10,000원이 안 나왔다.
여기서도 여유롭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쉬는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금까지의 여행은 항상 어딜 가거나 그냥 돌아다니는, 가만히 있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 루앙프라방에 와서는 (아내가 계속 속이 별로 좋지 않아 숙소에만 있는 날이 많아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지 않고 있다. 아직 비자가 열흘 정도 남아 있다는 것과 푸켓으로 가는 비행기도 보름정도 있어서 이럴 수 있겠지만, 오늘 4일째, 이틀 더 자면 6일, 여기서만 거의 일주일을 있을 생각은 안했다. 기껏 해봐야 꽝시폭포 다녀오고 뭐 3일 정도 생각하고 방비엥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바캉스(vacance)는 프랑스어로 ‘비움으로써 새롭게 채운다’는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어쩌면 나는 여기서 내 생각들을 비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생각했던 여행은 돌아다녀야 한다는 고정관념들을 말이다.
여행을 오기 전에 아내에게 여행 가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고 싶은지 물었다. 내 예상엔 쌀국수를 먹어보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자고 싶다는 대답에 좀 놀랐다. 아니, 비싼 돈 주고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하고 싶은 게 자는 거라니... 그런데, 아내는 여기서 정말 잠 잘 잔다. 그리고 많이 잔다. 나는 원래 잠이 적은 편이고 아내는 많은 편 같기도 한데, 정말 놀랍다. 점심에 자고 저녁에도 잘 잔다. 나로서는 잘 이해는 안되는...^^;
그래도, 여행에 와서 자기가 좋아하는 거 하는 건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행을 마치고 누군가가 ‘너 루앙프라방에서 주로 뭐했어?’라고 물었을 때, ‘응, 잠 많이 잤어.’라고 대답한들 뭐 어떤가. 꼭 루앙프라방에서는 꽝시폭포와 푸시산에 가고, 코끼리투어와 사원구경만 해야 한다는 ‘답’이 있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루앙프라방에서 이렇게 쉬고 있는 게 그냥 좋다. 루앙프라방은 나에게 여행에서도 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쉬는 게 이런 거라는 것을 알려준 고마운 도시다.
새벽 6시, 지붕과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제 저녁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는 있었는데 밤늦게나 새벽부터 비가 온 듯하다. 비가 오는데 우린 샌들도 없고 어떻게 돌아다닐 수 있나 걱정이 되었지만 일어나고 조금 생활할 시간(?)이 되자 해는 보이지 않아도 땅이 마르기 시작했다.
우선 우리는 호텔을 그냥 옮기기로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와이파이가 방에서 잡히질 않는 것. TV는 완전 평면이면서 방에서 와이파이가 제대로 안되다니... 이틀 머무른다고 했지만 그냥 하루치만 방값을 내고 바로 앞 숙소로 옮겼다. 같은 가격에 너무 좋은 게스트하우스! 옷걸이가 없었지만 괜찮다. 방이 조금 더 좁지만 괜찮다. TV가 브라운관이지만 보지 않으니 괜찮다. 2층이라는 이유와 발코니, 창문 3개가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다.
조마베이커리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라오비어를 사와서 침대에 앉아 책상에 노트북을 놓고 라오비어 한잔을 마시는데, 아, 기분이 정말 극도로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하노이에서 하노이맥주를 마실 때는 아내가 좀 잔소리해서 별로였는데, 이번엔 아내도 라오비어 한 번 마셔보라고 흔쾌히 허락도 해주고 좋은 숙소에 들어와서 기분 좋은 상태에서 마셔서 그런지 정말... 술맛=기분인 것 같다.
그리고 글을 쓰는데, 아... ‘술술’나온다 정말... 다 쓰고 아내에게 노트북을 넘겨줬다. 그리고 난 누워서 여행을 고민하면서 썼던 블로그를 천천히 다시 읽기 시작했다. 베개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이건,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나오는 눈물이다. 아내는 박장대소를 하며 정말 주책이라고 한다.
그런데, 아내가 사진이 필요하다고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 좀 보내달라고 했는데 사진이 없다. 헐. 폴더 통째로 사진이 없어졌다. 헐헐. 예전에도 이런 적이 한 번 있었지만 중요한 사진이 별로 없어서 그냥 잊었는데, 이번에는 여행 나오면서 아내 인터뷰 한 동영상부터 직금까지 찍었던 동영상과 소소한 사진들, 중요한 것은 카메라에 있어도 셀카봉으로 찍은 것들은 다 핸드폰에 있었는데... 헐헐헐. 복구하는 어플 같은 것을 깔아도 되지 않았다. ㅠㅠㅠ 난 아까워 죽겠는데, 아내는 “그래도, 우리의 눈으로 봤으니까.”란다. 그치... 우리의 눈으로 보긴 했지...
복구는 되지 않는 것 같아서 나도 그냥 잊고, 아내는 침대에 누웠고 나는 다시 밀린 블로그를 쓰기 시작했다. 점심때가 되었지만 아침을 늦게 먹어서 배는 별로 고프지 않았다. 아내는 언젠가부터 낮잠에 빠졌다. 정말 잠 많다. ㅎㅎ 글을 다 쓰고 살금살금 아내를 깨웠다. 정신을 못 차리는 듯 했으나 일어나서 나가기로 했다.
오후 계획은 마사지. 그동안 봐 둔 괜찮은 마사지하는 곳에 가니 사람이 없었다. 아내는 그동안 속이 안 좋았던 게 물갈이 같다면서, 배탈약 대신 항생제를 먹기로 하고, 식전에 먹어야 해서, 약을 먹고 마사지를 받고 밥을 먹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생수를 안갖고 나와서 다시 숙소로... 마사지샵에는 사람이 없어서 예약은 별도로 필요 없고 한 시간 후에 온다고 하니 알겠다고 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배가 고파서 샌드위치를 한 개 사먹었다. 우리의 단골 샌드위치 가게. 어떤 한국분이 가게 정 가운데 ‘다오네♥’라고 써줬는데 마치 이게 간판 같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동안 나는 라오어 사전을 실행시켜 포스트잇에 또 라오어를 적기 시작했다. 구불구불 라오어. ‘아침에 바나나 잘 먹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돈과 함께 메모를 주니 천천히 읽더니 웃으면서 좋아한다. 그러더니 다시 또 바나나를. 헉, 이러려고 메모를 준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기분 좋게 받고 내일 또 오겠다고 했다.
숙소로 가는 길엔 비가 점점 많이 오기 시작했다. 신발이 젖었다. 아... 신발 젖는 거 정말 제일 싫어하는데... 다행히도 반바지를 입어 바지 밑단은 젖지 않았다. 바지 밑단 젖는 건 더 싫다. 숙소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우비를 입고 나갔다. 다시 열심히 마사지샵으로... 가는 동안 비가 더 많이 와서 신발은 더 축축해졌다. 그런데, 마시지샵 문을 여는데 사람이 꽉 찼다. 그리고 수많은 마시자사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막 전화도 해서 다른 가게 사람들을 부르는 것 같았다.
이런 중국 사람들!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우리의 마사지샵(?)을 점령해버렸다. 1시간 전만 해도 사람이 없어서 예약 없이 와도 된다고 했는데... 불러서 묻고 따져도 이거 어쩔 수 없단다. 좀 멘붕에 빠졌다. 다른 마사지샵에 갈까 했는데 아내는 거기는 별로일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일단 다시 숙소로 갔다. 우비는 복도 난간에 걸쳐놓고 1시간 정도 쉬다가 아내가 밥을 먹을 시간이 돼서 나갔다. 비는 좀 그친 것 같았고, 우비도 좀 젖어서 그냥 나갔다.
식당에 가서 모닝글로리(야채볶음), 소고기볶음밥, 시저샐러드를 시켜먹고(이것도 10,000원 정도), 마사지샵으로 갔다. 가는 길에 조리를 살까 했는데 너무 싸구려 같은 것을 비싸게 부르고, 그리고 사봤자 발만 아플 것 같아서 사진 않았다. 그러면서 운동화는 더 젖고... 마사지를 받으려고 하니 남자 마사지사만 있단다. 헐. 아내는 (당연히) 싫다 했고, 우린, 다시 나왔다. 가는 길에 그럼 꼬치나 먹자고 했는데, 양이 엄청 많아서 둘이 못먹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이것도 내일 먹기로...
비는 정말 세차게 왔고, 우비를 입지 않은 우리의 겉옷은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내는 바람막인데, 나는 두툼한 기모 면 잠바였다. 어깨는 이미 속까지 젖어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 숙소로 와서 신발을 벗는데, 맨발에 신고 젖어서 그런지 깔창까지 같이 딸려서 벗겨진다. 아... 정말 싫어... 밤새 비 오면 이거 마를 수나 있으려나...
아내는 씻었고, 나는 그냥 누웠다. 잠이 솔솔 온다. 아내는 안 된다고, 지금 자면 새벽에 깨서 안 된다고 했지만, 잠이 오는 걸 어떡하나... 평소 같으면 안 씻고 자는 나를 괴롭혀서라도 깨워서 이는 닦게 만들었지만, 비 맞고 오후 일정 ‘잡친’ 내 기분을 아는지 그냥 잠들게 해줬다. 그리고 난 새벽 1시에 깼다. ... 엄청난 오해를 받아 해외로 도피하는 꿈, 게다가 지금 여행하고도 딱 맞는 상황들에서 겨우 눈을 뜨고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2시 반이 넘어가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 블로그를 구경하다가 오늘의 일기를 쓰고 있다. 아내는 자고 있다. 늦게 잠들진 않았을 것 같은데, 낮잠도 잔 사람이 이렇게 밤에도 잘 잘 수 있다니, 정말 놀랍다.
인생사 새옹지마,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래, 오늘 오전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좋아도 정말 너무 좋았다. 운수 좋은 날이었다. 오전에 감지했어야 했는데... 오후에 꼬인 스케줄 때문에 기분이 이렇게 최악(...)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기분이 이렇게 별로가 될지는 몰랐다. 비에 흠뻑 젖어서 축 쳐진 기분으로 돌아올 때는 ‘루앙프라방에 그냥 아쉬움을 두고 떠났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건 루앙프라방 때문이 아니다. 이건...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 때문이라고, 그냥 저 사람들 탓을 해 버리는 게, 루앙프라방에서의 남은 이틀을 기분 좋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새벽 2시 반.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나무집들과 야자수, 주황색 조명은 ‘여전히’ 아름답다. 기분이, 다시 좋아진다. :)